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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 사랑의 기초

.............................. 2013. 4. 22. 19:23

-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 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것을.


- 결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부르주아라는 특정 경제계급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지를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엔 자유와 제한의 균형이라는 부르주아의 철학이 신기할 정도로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부르주아는 낭만적 사랑을 결코 믿지 않을 만큼 먹고 사는 문제에 짓눌려 있지도 않았지만, 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전혀 거리낌 없이 복잡하게 얽혀들 만큼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정서적 욕구와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곤경에 처한 부르주아는 '영원을 서약한 한 단 한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투자하여, 그로부터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갈망하기' 라는 빈약한 해법을 찾아냈다.


-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상대가 내 눈에 어떤 사람으로 비쳐야 하고 그와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 마땅하다는 이상을 바탕으로 서로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품고 있는 이상이 고통스러운 배신과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문제 중 하나는,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대수롭지 않은' 디테일이라는 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획에 수반되는 완벽을 향한 의지는 지칠 줄 모르는 전일론적 갈마이기 때문이다. (중략) 평균적인 부부들은 커뮤니케이션, 요리, 미학, 교육, 정치, 패션, 섹스, 재정에 이르는 온갖 영역에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려 든다.


-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결혼해서 잘 사는 법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행기 착륙법이나 외과수술법을 직관으로 터득하길 기대해선 안 되듯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더불어 살기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비결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로 알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가 발명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 덕분에 발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낭만적 사랑도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관습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많이 투자하고 생산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재를 가차없이 심판하는 시스템 속에서, 더구나 이처럼 종교를 저버린 시대에 우리의 정신이 버텨낼 수 있으려면 비물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다른 평가방식이 절실해진다. 그 보루마저 없다면 심판의 위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우리의 내면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 ... 그렇지만 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어릴 때부터 깊이, 편향적으로 주입받지 않고서는 후일 세상이 우리에게 선사할 무관심의 바다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특별한 나'는 세월이 흐르면 점점 희미해져 갈 필요불가결한 환상이다. 그 결과로 얻게 된 자기연민의 마지막 흔적조차 사라질 마흔살 무렵이 되면 헛된 꿈에서 깨어나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을 똑똑히 바라보며 살게 될 것이다,


- 예전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집중해서 읽는게 어렵지 않았다. 체호프와 경쟁할 만한 거라곤 골목길을 따라 이십 분 걸어가서 나누는 이웃과의 수다가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델 컴퓨터의 모니터 창을 두 개로 나눠서 한쪽에는 치어리더 사진을 띄워놓고 다른 창으로는 MSN 메신저로 스물다섯살의 날씬한 뮌헨 아가씨와(실제로는 하노버의 우락부락한 트럭 운전사일 수도 있다) 미네소타에 사는 십대 풋내기 레즈비언 행세를 하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한 시대에 체호프든 다른 어떤 문학작품이든 간에 읽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 어린 시절 우리는 세상의 전부인 사람에게 우리도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생후 4개월 된 아기고, 높다란 아기의자에 앉아 침을 흘리며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려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엄마는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없이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서정시풍의 느낌. 방금 전에 우리는 배불리 젖을 빨았고, 나른하게 졸린 상태고, 우리의 천사 시종은 그저 공손할 뿐이다. 친절한 그녀는 가장하고 과장함으로써 우리가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북돋운다. 솔직히 우리가 침으로 거품을 만들어가며 하는 별난 짓들이 그렇게까지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해야 할 설거지도 산더미다. 대학에서 문학이나 드라마를 전공한 서른살 여성에게는 까꿍놀이도 한계가 있다. 물론 그녀는 우리를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는 아니다..
 엄마에겐 남편이 있고 친구들도 많고 복잡한 이해관계도 있다. 그녀는 나날이 나아지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자기 엄마에게 전화도 하고 싶고, 울타리도 손질하고 싶다. 그녀는 길 아래 카페에 가서 커피와 아몬드 크루아상을 먹고 싶다. 어느 날 그녀는 우리의 동생을 만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한두 번은, 우리를 돌보다 너무 지쳐서 이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젖은 베개에 대고 실토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녀의 인생을 망쳤다고.


- 요약하자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이 침해당하거나 훼손되지 않은 채 다른 모든 요소들과 공존하는 상태,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결혼생활의 갈등이 해결되는 상태를 원한다면, 답은 없다.


-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이 자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분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