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단어,
그는 이제까지의 내 인생을 하나의 단어로 요구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 아침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뭉게구름처럼 찬물 한잔으로 풀어지는 생각들, 삼십 년산 책장에 가득한 책들, 읽어본 것들과 앞으로도 읽지 않게 될 페이지들, 어떤 페이지에서는 도저히 멈출 수밖에 없던 이유들, 이 모든 것들을 단 하나로,
하지만 나는
깨자마자 잊히는 내 꿈의 주인공
멈춰버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상상들까지
단 하나일 수 없는 나
그리고 다시 넘쳐나는 생각과 생각들, 코와 입과 눈 밖으로 흘러내리고 지금도 흘러내리는 중인 보이지 않는 생각들이 매일 밤마다 나를 덮치고 그것들과 싸워 이기면 건강한 내가 되고 그러지 못한 날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건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드는 나를, 한 단어로, 그렇다면,
나는 의자이며
나는 기차고
나는 파도라서
내일은 갈매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
그와 내가 있는 방
그와 나 사이에
금빛 모래가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 작은 것들이 모여 서로 몸을 비비면 더욱 반짝인다는 것을 언젠가 그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손목의 시계와 닫혀 있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고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나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나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출생지와 거주지에 대해 또한 점수와 순위들에 대해,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바라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라는 것을 때때로 모르는 척하는 사람 중
내가 어디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고
그도 결국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지금의 나는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내가 성실하고 함부로 질문하지 않고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원하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보여줄 수밖에
내 꿈이 한때는 예민한 후각을 가진 시인이었고 밤마다 몰래 이웃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는 화가였고 부드러운 손바닥을 지닌 병아리 감별사였다는 것을
일기장을 가져올 걸 그랬지
한 문장
두 문장
다시 한 문장
사실은 훔쳐온 문장들이 너무 많았고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언제나 일기를 끝내지 못했고 시작도 못하는 날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단 하나로는 도무지 안 돼서 줄줄 흘러넘치는
나는 조이스틱, 인공지능, 한때 잘나가던 경주마,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가도 내가 되지 못한 것들과 내가 두고 온 것들에게 자꾸 마음이 가서 때때로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의 단어,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의 예의바른 미소와
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흘러넘친 나를 그대로 두고 온다
무수한 단어들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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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길에 복권을 사고 잠시나마 오색찬란한 꿈을 꾸었을 누군가가 있었겠지요. 결코 오지 않는 행운에 그러면 그렇지 읊조리고 무심하게 책갈피로 썼을 누군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책을 뒤적이다 복권을 발견하고 예전의 마음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복권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부여됩니다. 지나고 보니 잘 버텨왔던 날들에 대한 행운을 상징하는 거지요. 그러니 어쩌면 오래된 복권은 모두 당첨된 복권일지도 모릅니다(채널예스 인터뷰 중).
- 시를 쓰고 나서는 그 시와 낯설어지기를 기다린다(이수명 시인).
- 문학이 사실은 배고픈 사람 하나도 구할 수 없고 큰돈을 벌 수도 없어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알게 된다(김현 평론가).
- 언어는 늘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더 정확한 언어를 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말씀하신 대로 보편적으로 정의된 적이 없는 언어는 수많은 감도가 있을 텐데, 그 감도에 맞는 언어들을 찾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해요(투데이신문 인터뷰 중).
-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다짐한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둥글”(「검은 절 하얀 꿈」)어 일견 평화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편편의 시들은 그 유연함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임을 확인케 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낸 두부처럼, 부드럽게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순백의 눈처럼 희고 고요한 힘을 지닌 시가 여기 도착했다(ABC뉴스 서평).
- 이 시를 엮는 동안 여러 번의 겨울이 왔다 갔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자주 졸았는데 가끔은 이대로 계속 잠들어도 좋겠다 싶은 밤이 있었다(시인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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