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

-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 <늑대들의 햇님>이란 그의 고향에서 달님을 가리킬 때 하는 말이다.

- 흙손으로 모르타르를 고루 펴 바르고, 그 위에 벽돌을 빨리 올려놓는다.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재빨리 흙손 자루로 두르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바깥쪽 벽이 수직선에 맞게 오고, 옆으로나 수직으로나 기울어진 데가 없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젠 됐다. 두층만 더 쌓으면, 예전에 잘못 쌓아놓은 곳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훨씬 수월하게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지금은 정확하게 잘 살펴야 한다. 슈호프와 다른 벽돌공들은 아예 추위도 잊어버렸다. 빨리 일을 하느라고 서두르다 보니 몸에 땀이 다 날 정도로 더워진다. 

- 죄수들에게는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춥고 배고플 때이다.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춧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 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뭣 때문에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 거죠? 만일 자유의 몸이 된다면, 당신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셔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제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수모를 견디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담고 있는 책”이자 “고통스럽고 남루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켜가는가. 인간의 품격과 인간다움, 이런 것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켜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하는데(유시민), 그렇게 와닿는 설명은 아닌 듯 하다.

나는 오히려 (나의 경우야 자발적이지만)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 과업을 성취하면서 역설적으로 느끼는 순수한 기쁨에 주목하였다.  뭔가 평생 편안한 자신의 감옥 속에서 벽돌을 쌓으며 즐거움을 느낄 것 같은 이 기분... 여기까지 오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황을 오히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전신마취가 수반되는 수술을 하고 예능을 하루 보니까 바로 지루해졌고, (복잡하지 않은 것만 취사선택하여) 메일 회신을 하며 편안함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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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 나는,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게 아니며, 어쨌던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늘 엉뚱한 대답이나 하고 야심이 없으니 그건 사업하는 데는 대단히 좋지 못한 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로 돌아와 일을 했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삶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 마리가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결혼을 원하는 쪽은 그녀고, 나는 그저 그러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중대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냐."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없이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녀는 다만, 자기와 같은 식으로 사귀게 된 어떤 다른 여자가 똑같은 제안을 했어도 내가 받아들였을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또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언젠가는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내가 싫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내가 더 보탤 말이 없어 잠자코 있자, 마리는 미소를 띄면서 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게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단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그가 말했다.  "내가 볼 때,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하나의 불행. 그게 뭔지는 누구나 다 압니다. 불행이라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겁니다. 에, 또! 내가 볼 때,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그는 더 계속하려고 했으나, 재판장이 됐다고 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셀레스트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간단히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셀레스트는 또다시 그것은 하나의 불행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네, 알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그러한 불행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말했다.

자신의 지혜와 성의를 다했으나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는 듯이 셀레스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번쩍이고 입술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위해 자기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에게 묻는 듯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신문에서는 흔히 사회에 대한 부채를 말하곤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탈출의 가능성, 무자비나 의식 밖으로의 도약, 희망의 모든 기회를 제공하는 광란의 질주였다. 물론 희망이란, 힘껏 달리던 도중 길모퉁이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호사를 나에게 허락해 주는 것은 아무 도 없고 모든 것이 나에게 그런 호사를 금지하고 있었으니, 기계 장치가 나를 다시 붙잡는 것이었다.

- 아무리 해 보려 해도 나는 그러한 오만방자한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제공한 판결과, 판결이 선고된 순간부터의 가차 없는 전개 과정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17시가 아니라 20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속옷을 갈아입는 존재인 인간들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프랑스(혹은 독일, 중국) 국민 같은 지극히 모호한 개념에 의거하여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이 그 결정의 진지성을 많이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선고의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짓뭉개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심각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죄인이었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잇었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 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해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방인에 대한 편지(파리, 1954년 9월 8일, 알베르 까뮈)]

- 뫼르소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거기서 어떤 정직성의 모럴을,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기쁨에 대한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찬양을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둠이라던가 표현주의적인 희화라든가 절망의 빛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판 서문(알베르 까뮈)]

- 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봐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 선고를 받는다.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로제 끼요)]

- 이방인은 우선 한 인간입니다. 이방인은, 가장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무관심[혹은 무차별(indifference)]이 윤리의 한 형식이라고 믿는 인간입니다.  뫼르소에게는 모든 것들이 무관(indifferent)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결혼하는 것과 결혼하지 않는 것, 범속한 장례식과 종교적 장례식, 직장에서 승진을 하는 것과 승진을 하지 않는 것이 다르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시신을 옆에 두고 밤을 새운 다음 양로원의 늙은이들이 악수를 청하자 그는 그들과 친근해진 증거라고 느낍니다. 잠시 전에는 그들에게서 적의를 느꼈던 그가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의 반응에 대하여까지 무관심하다는 사실입니다. 날이 새자 그는 자기 사무실 동료들이 그때쯤 출근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자기는 잠에서 깨는 그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어떤 다른 사람의 관심사이기나 하듯이,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에 좀 정신을 팔고 있었지만, 건물들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주의가 산만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기를 거절할 때도 왜 거절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아뇨."라고만 합니다.  요컨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방인인 것입니다.  마치 그의 감정들과 그가 그 감정을 체험하는 방식 사이에 어떤 괴리가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그 감정들이 그를 스쳐 가기만 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입니다.

- 뫼르소는 마리에게도 재판관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과장해 불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간결한 표현과 완서법(litote)*이 특징인 인간입니다. 폴 발레리의 표현을 빌리건대, 그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합니다. 그가 파멸하게 되는 것은 웅변적인 수사를, 어떤 유의 언어상의 낭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완서법: 완서법은 수사법의 하나이다.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그 반대의 의미를 부정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를테면, 「좋다」 대신에 「나쁘지 않다」라고 말하거나, 「어리석다」 대신에 「현명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방법이다.

[작품 해설]

- 그는 작가수첩 I(72쪽)에 다음과 같은, 인생관의 중요한 변화를 암시하는 듯한 기록을 남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결혼, 출세 등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는데, 패션 잡지를 읽다가 문득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 잡지에서 말하는 바로 그러한 삶)과 무관한 존재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 1부 - 그때까지의 삶. 2부 - 유희(le jeu). 3부 - 타협의 거부와 자연 속에서의 진실."

- 작가수첩 I(146쪽)에서는 까뮈의 소설 미학의 한 핵심을 이루는, 다음과 같은 성찰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그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 - 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과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 "우리들 각자는 최대한의 삶과 경험을 쌓아 가지만 결국 그 경험의 무용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만다.  무용함의 감정이야말로 그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는 또한 "그렇다고 해서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중략) 피에르 앙리 시몽이 지적했듯 사르트르와 달리 "카뮈에게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활동 속에서도 삶의 무용함에 대한 의식은 그 활동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행동의 한복판에서 행동에 가담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행동에서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라고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는 말했다. 부조리에 대한 의식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로,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고,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에 의하여 유한하게 한계가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삶은 더욱 귀중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의 절망이 아니라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입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어두운 밤 시간이 등장하지 않는, 영원한 여름, 영원한 태양의 소설 이방인의 진정한 결론입니다.

 

나에겐 구원같은 책.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나를 몇 번이고 일으켜준 책. 1부는 "정다운 무관심" - 무관심에 대한 위로 내지 허무에서 오는 동질감을, 2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도 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역자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우나, 이를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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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연차를 쓰고 조우한 공간과 시.
(연차를 쓴 날 저녁에 출근해서 이러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책임감인가, 극단적인 회피의 양태인가?)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전략)
눈을 뜨고 커튼을 열자 산허리에 안개가 자욱했다
분명 아침인 것 같은데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들, 하얀 눈밭 위로 소리 없이 바람들이 몰려다니고 나는 침묵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움이 속된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청춘이다 지난 내 감정의 우듬지에서 말없이 흔들리며 서서히 피어오르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단 한 대의 기타도 지니고 있지 아니하였고 부를 만한 노래도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그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물들에게 담배 연기의 연주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스러운 감정의 근원이 알고 싶었지만 나는 침묵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우고 나자 다소간의 현실감이 밀려왔다
지난밤의 숙취, 지난 세월의 숙취들, 나는 문득 아득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지난 숙취의 날들 속에서 내가 무수히 내뱉었던 말들이 뽀족한 화살이 되어 내 심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 앞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헌신했지만 사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유리창 밖은 어느새 캄캄하게 어둠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고 오래간만에 장을 보러 나갈 준비를 했다, 나에겐 지금 몇 병의 술과 조금의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마트에 들려 쌀 한 포대와 내가 즐겨 마시는 몇 병의 술을 사들고 돌아올 것이다
리스본 외곽에 위차한 나의 숙소를 서서히 어둠이 서서히 점령해오고 있었다,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파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실감이 없었다
창밖은 온통 어둠뿐인데 왜 나는 백야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일까, 사흘 밤낮을 퍼부었던 눈발이 녹지 않았기 때문인가
나는 음악을 몇 개 구해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이 겨울을 날 것이다, 커튼의 안과 밖에서 미풍과 광풍이 교차하며 불어갈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나는 침묵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다만 넉 장의 흑백사진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나의 고독은 그렇게 무르익어갈 것이다
그것이 다인 것이다, 무엇이 더 있겠는가,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략)
저녁에 일어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말고 어두워지는 눈 덮인 들판을 바라보다
시차에 적응할 수 없는 나날들의 현기증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오며 바라본 밤하늘엔 초저녁 별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떠 있다
고독을 생산하는 공장이 이다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나는 이 공장에서 열심히 고독을 생산하는 노동자인 것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을 읽다
그의 소설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면서도 뭔가 가슴 한쪽에 찡한 울림을 준다
경쾌한 발언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슬픔의 개인사, 날씨들의 세계사
저녁 겸 아침을 든든히 먹고 커피 석 잔 담배 넉 대, 다시 작업 시작
이곳의 기온이 드디어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도 밤하늘의 별들은 얼어붙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나도 언젠가 저 별들과 함께 허공을 따라 나의 길을 가겠지만 지금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창 밖의 어둠을 보며 날씨의 세계사를 적어나가는 밤

고독은 꾸준히 생산되지만 아무도 고독을 소비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재활용 중이고 시는 여전히 탄생 이전

(후략)

 

봉쇄 수도원

(전략)  

푸른 전등의 새벽. 이 푸른빛은 어디서 오는가.

고요한 침묵의 사다리를 타고 나의 다락방으로 스며드는 이 새벽의 전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아무리 봉쇄해도 봉쇄할 수 없는 내면의 푸른빛

나의 글은 그 푸른빛에서 와서 태양이 불을 밝히는 시각에 사라진다

목이 마르고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작은 화분의 푸른 잎들을 스치며 지나간다

(중략)  

태양이 사라진 지구의 한편에서 달의 전구를 밝혀 놓고 고요히 밤을 적어나간다.

밤은 태양이 남겨둔 기억의 그림자. 그림자를 밟으며 고독하게 유령이 걷고 있다

(중략)

가출 혹은 여행의 삶.

희미한 공기처럼 세계의 골목을 떠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죽으려 했던 나의 꿈이.

이렇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내면의 푸른 기억을 적어나가는 새벽이면

가장 먼 곳에서 반짝이며 나를 부르는 골수분자 같은 삶. 질기고도 비린 유전자의 집.

나는 유령이었고 사는 동안 나는 끝내 유령일 테지만

새벽 네 시 나는 드디어 나에게 갇힌다. 봉쇄 수도원.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전략)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맥주 가게와 담배 가게를 다 지나면 아직 야근 중인 엥겔스의 공장 불빛이 빛나고 마르크스의 다락방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빛 아래서 누군가 끙끙거리며 생의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지

누군가는 아프게 생을 밀고 가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밤을 탕진해도 되는 걸까 생각을 하면 두려웠지 추웠지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너의 노래를 따라 불렀지

(후략)

 

- 그의 시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읽어야 한다. 새벽 서너 시쯤 혼자서 중얼중얼 소리 내야 한다. 박정대 시인(49), 그의 얘기다. “오전 10시 은행 창구 앞에 앉아서 내 시집을 읽으면 현실의 모든 걸 포기하고 죽고 싶거나 ‘이게 뭐야’ 하면서 시집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거다. 밤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서 술도 한잔했고 잠도 안 오고 뭔가 보고 싶을 때 시집을 펴면, 박정대가 쓴 게 아니고 내(시를 읽는 이)가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거다.

- 내가 쓰는 시에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이 담긴다. 현실을 무시한 꿈은 현혹일 뿐이다. 내 시를 보면서 위안을 얻고 진짜 현실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시는 내면적 리얼리즘이다.

- 그는 밝은 대낮에는 충실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다가 퇴근하는 그 순간 ‘나는 글 쓰는 사람이고 시인이다’라는 자의식을 충전시킨다. 일찍 저녁을 먹고 잠들었다가 밤 11시에 일어난다. 온전한 시인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음악을 듣다가 발동이 걸리는 새벽 서너 시에 시를 쓴다.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면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킬 때도 더러 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스스로 시인임을 의식하지 않으면, 예술가적 감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평범한 시민이 될 뿐이다. 내가 헌신하는 예술적 시간을 위해서 그 나머지를 희생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0129/60469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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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 파친코

from 도서 2023. 6. 1. 20:56

이것도 작년에 선물받은 책인데 독서가 너무 늦었다.  1편의 흡입력은 압도적이었고, 2편의 마무리는 아쉬웠다.  유기적인 구성은 돋보였으나, Thesis statement를 제외한 나머지 개별 문구 중 마음에 확 들어오는 문구는 많지 않았다(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 -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작가가 의도한 단어 내지 문구의 울림이 희석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

-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역사는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Test everything. Hold on to the good.(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 아버지와 어머니와 선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각형으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선자가 고향에서의 삶을 회상할 때 그리운 것은 그 친밀한 관계였다.

- 창호는 남편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사랑했고, 어쩌면 그것이 경희를 사랑한 이유일 터였다.  경희는 자신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 한수는 '공부하라'는 말 대신 '배우라'고 했고, 노아는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움은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

- 미처 모르던 진실을 갑자기 깨닫는 것(anagnorisis)과 사건이 급전되는 것(peripeteia)

- 조선인이 선량하든 불량하든 상관없이 노아를 조선인으로만 보는 것은 결국 불량한 조선인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키코는 노아를 한 인간으로만 볼 수 없었고, 노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저 한 인간으로 여겨지고 싶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 나는 민족의 정의를 이렇게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의 정치 공동체이다.  본성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주권을 지녔다고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된다'.  제일 작은 민족의 구성원일지라도, 동포 대부분을 결코 알거나 만나거나 심지어 소식을 듣지도 못하지만, 각자의 마음 속에 동질감이라는 관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제한되어' 있다고 상상된다.  인구가 10억 명에 달하는 제일 큰 민족이라도 유동적일지언정 한정된 경계가 있고 그 너머에는 다른 큰 민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주권을 지녔다'고 상상된다.  이 개념이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성하게 부여된 계급적 왕국을 무너뜨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자에게 만연할 지 모르는 실제의 불평등과 착취에도 민족은 항상 깊은 수평적 동포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동포애가 지난 두 세기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런 제한된 상상의 산물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던지게 했다(베네딕트 앤더슨).

- 인간은 끔찍해.  맥주나 마셔.

- 홋카이도의 설산이 그리웠다.  눈 덮인 추운 숲속에서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검은 나무들 아래를 걷고 싶었다.  삶에는 모욕당하고 상처받을 일들이 너무 많았고, 에쓰꼬는 자기 몫을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치욕이 쌓여 있는 처지이면서도 솔로몬의 치욕을 가져다가 자신이 떠안고 싶었다.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선자가 이 세상의 악에 대해 물었을 때 이삭이 이 구절을 가르쳐 주었다.  

 

아래는 보그지 인터뷰 중 발췌.

"“수백 명을 인터뷰하면서 ‘저런 사람이구나’로 시작했다가 ‘내 생각이 틀렸구나’ 깨닫게 될 때가 많아요. 사람들은 정말 복잡해요. 아름답고 돈 많고 똑똑하고 인기 많고 성공한 사람도 알고 보면 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인식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지레짐작을 안 하게 되죠.” 그녀는 강연 중에 이렇게 말한다. “Reality corrects my preconceptions, and my eyes and my ears experience what my characters may ultimately feel(현실은 내 선입견을 고쳐주고 내 눈과 귀는 내 주인공들이 느낄 감정을 직접 경험한다).” 수많은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많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이를 지키기 위한 용기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혐오에 맞서야 할 때가 있어요. 국가나 역사의 시스템에 의한 것이든, 일반 시민에게서 오든 분명히 혐오는 존재하고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죠. 진정한 용기는 그 혐오에 대해 또 다른 혐오나 폭력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 복수심에 불타오르지 않게 감정을 관리하는 것, 시니컬해지지 않는 것이죠.”

 “Our crowns have been bought and paid for-all we have to do is wear them(우리는 비용을 이미 다 지불한 왕관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삶에서 얻고 싶은 모든 건 이미 우리 내면에 있으니 단지 용기를 내서 그걸 발견하고 당당하게 살아내면 된다. 

https://www.vogue.co.kr/2021/07/26/%ED%95%9C%EA%B5%AD%EA%B3%84-%EC%86%8C%EC%84%A4%EA%B0%80-4%EC%9D%B8/

 

평생 한국에 대해 쓸 것, ‘파친코’ 작가 이민진 인터뷰

해외에서 한국계 작가의 소설이 읽힌다는 것은 단순히 국경을 뛰어넘은 뛰어난 소설의 탄생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시안 아메리칸, 이민 가족, 아시안 청소년, 소외된 아웃사이더 등 엄연히 존재

www.vogue.co.kr

 

이코노미조선 인터뷰 발췌.

매일 성경을 한 챕터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나서 미국 작가 윌라 캐더가 매일 성경 한 챕터를 읽는다는 걸 떠올리고 그걸 작업 습관으로 시작했다. 나는 서양의 클래식한 문학에 심취해 있고,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서양의 문학과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편당, 11년 혹은 26년의 창작 기간이라니…지치지 않나.
“Writer’s Block(글길 막힘, 집필 장애 상태)으로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희한하게도 글쓰기 자체는 간단하다. 어려운 것은 실제로 옳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현실 기반 소설을 쓰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처음 두 권의 책을 쓸 때는 내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코리안 3부작’ 마지막 작품인 ‘아메리칸 학원’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에 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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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언제나 기분좋다.

행복해지는 선물을 주고받고, 무해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을 잔뜩 만난 것이 우리 회사를 선택한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앤아버가 아닌 LA를 택한 그의 행복을 빕니다.

책 자체는 가벼운 수필 내지 개별적인 도시에 대한 단편적인 감상 수준을 모은 수준의 것이었다.  창밖의 풍경을 스치듯 바라보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었다.  대단히 감명깊은 문구는 그다지 없었으나 기억 환기용으로 몇 개만 정리.

[책을 펴내며]
- 나에게는 외국어로 책 한권을 쓰는 일은 늘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외국어로 책을 쓰기 위해서는 생각을 먼저 잘 정리해야 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앤아버]
- Thomas Wolfe, You Can't Go Home Again(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1940)
- 앤아버로 돌아오면서 나는 과거로 돌아온 셈이다.  앤아버를 떠나며, 나는 비로소 미래를 향해 다시 떠나는 듯 했다.  나는 바랐다.  이 길이 다시 한번 변방을 떠나 어딘지 모를 나만의 중심을 향해 이어지기를.  젊은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긴 하다.  변방과 중심은 장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걸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서울]
-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조용하게 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옛 추억을 떠올리는 맛을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느낌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움이라는 한국어보다는 포르투칼어인 '소다드(saudade)'가 더 적합할 듯 하다.  소다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그리는 애수, 향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애수와 향수를 느낌으로써 과거, 즉 예전의 기억과 나누는 소통의 즐거움 역시 소다드다.

[대전]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더블린]
- 스미딕스

[런던]
- 이러한 우월감은 제국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과 변방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문명의 우월함을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지배하는 명분으로 내세운다.  문화, 경제, 종료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스스로가 대단히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고 여기는 동시에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의 문화, 경제, 종교 등을 존중하기는커녕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면서 피지배국에 자신들의 문명을 주입시키는 행위를 마치 커다란 시혜라도 베푸는 것으로 미화한다.

[구마모토/가고시마]
- 가고시마 사람들은 정이 두텁다(人情が厚い).
- 일본의 미래는 앞으로 이 나라가 얼마나 규슈 또는 구마모토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검소한 삶과 선함, 단순함을 좋아하고, 쓸데없는 호화와 낭비를 싫어하는 그 정신 말이다.

[교토]
- 그 절의 625년 역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미국만 해도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크고 높은 성취를 이뤄야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는 있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되지 못하는 세대인 경우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625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사는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마도 자신만의 한평생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의 삶과는 다를 것 같았다.  수백 년 전부터 이어온 절의 역사에 자신의 역사가 함께 흐르고, 자신의 역사 뒤에 또다시 수백, 수천 년의 역사가 이어진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야말로 역사의 크고 깊은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이 끊임없이 들 것만 같았다.  교토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수백 수천 년의 역사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깐이지만 교토 전체가 새롭게 보일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살게 된 나의 삶이 커다란 흐름 속에 속해 있는 지극히 작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 품위를 강조하는 이면에는 늘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잡고 있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의식이 교토 전체에 배어 있다.
- 개인주의가 강한 분위기인 탓에 교수라고 해서 저절로 존경하는 분위기는 절대 없다.  교수라고 해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묘한 압박감을 더 느낀다.  알아서 하게 할 자유가 주어졌으니 정말 알아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모두에게 있는 듯 했다.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노출하는 것도 꺼리지만 다른 사람의 흐트러진 모습에도 민감하다.
- 교토는 복잡하고 거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품위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매력적인 이상향이다.  200년대 초 교토 지하철에는 이런 광고가 붙어 있었다.  '일본에 교토가 있어서 좋다'(日本に、京都があってよかった。).

[프로비던스]
- 누군가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곤 한다.  어디인들 답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거쳐온 수많은 도시가 바로 내가 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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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2012)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가 제 초점이었어요. 개인에게 생긴 슬픈 일을 슬퍼하는 건 당연하죠. 관건은 타인에게 일어난 슬픈 일을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는 것이죠. ‘슬픔의 연대’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요. 2008년 여름, 시인 될 궁리만 하던 때였습니다. 20살 때부터 신춘문예에 줄창 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렸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 되는 법은 학교나 강좌에서 배우는데, 시민 되는 법은 어디서 알려주나.’ 저희가 정치의식 있는 세대는 아니지만, 그때부터 집회에 자주 나갔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어요. 용산참사 때도 그냥 걸어서 주변에 서 있다가 돌아오고…. 그때부터 ‘타인의 슬픔’에 대해 적어볼까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 깊은 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겠죠. 단지 그 슬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거기에 개인의 슬픔이 섞이니, 결국 슬픔의 절대량이 늘어났습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는 밝은 마스크를 쓰고 잘 살아가지만, 기본적으로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만나서도 할 말을 잘 못해요. 그게 제 첫번째 후회입니다. 후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기’입니다. ‘그때 괜히 그래서…’ 하는 거죠. 하물며 연애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서 후회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단, 제 시에 ‘당신’ ‘미인’ 같은 호명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모두 연애 상대는 아닙니다. 연인이기도 하고, 강이기도 하고, 정치인일 때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은 누나이기도 합니다. 내 옆에 없으니까 후회되는 일이 많죠. 그런 감정들이 연시의 톤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사랑시는 사랑을 시작해 두근두근하거나, 막 끝났을 때는 못 써요. 마치 컴퓨터 폴더 안에 있는 몇 년 전 여름 사진을 꺼내보듯이 써야죠.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라옵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01121722005#c2b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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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 밝은 밤

from 도서 2021. 11. 9. 23:19

@궁뜰어린이공원 @책바

생일에 책 선물을 몇 권 받았는데 너무 좋았다.  취향을 헤아리고 마음을 써줘서, 잊고 지내던 감정들을 다시 들여다볼 기회를 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읽은 지는 조금 되었지만 좋았던 감정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인상깊었던 문구를 아카이빙.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이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중략)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거야.  넌 더 단련되어야 해.  이런 취급에는 이미 익숙해졌잖아.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이게 꿈이에요.  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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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보다 마음이 참 힘들었던 주말 "커리어의 씁쓸함과 실존적 무게로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려 깊은 책"이라는 소개 문구에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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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세속적 성공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려는 첫 번째 산을 정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마흔 이후로 전력질주를 이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밖에 없는 여러 상황을 경험하고 나니, 남이 아닌 내가 더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일지 궁리하게 된다.  이기심으로 돌아선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 잘 살기 위한 방법론 위에서 나 자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남은 인생은 너무 막막한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또, 어떤 일이 나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주며, 내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때마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방안은 남은 인생처럼 막연하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 고민에 맞닥뜨리는 시기를 두 번째 산에 비유한다.  물질적인 첫 번째 산을 넘은 뒤 찾아오는 진정한 인생의 고민.  (중략) 결국 사회적 관계는 인생의 성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며,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다."

"삶의 공허 앞에서 브룩스는 이제 그만 첫 번째 산에서 내려와 두 번째 산에 오를 때가 됐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을 오르는 삶이 나의 성공을 위한 삶이라면, 두 번째 산을 오르는 삶은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헌신의 삶을 말한다.  헌신의 깊은 유대 없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삶의 뿌리들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쓰러지기 마련이다.  타인을 위한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할 소소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몰입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자 토대가 되어야 한다."

서문

사람들의 삶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취직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며 자신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산을 찾아낸다. "난 의사가 될거야" "난 기업가가 될거야" 첫 번째 산에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인생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 과업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확고한 자아를 세우고,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이다. 이 첫 번째 산에 오를 때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 평판 관리에 신경쓴다.  그래서 늘 점수를 기록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내 순위는 전체에서 어디쯤일까?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첫 번째 산에서 사람들이 설정하는 목표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규정하는 통상적인 목표이다. 성공하기, 남들에게 존경받기, 제대로 된 사회 집단에 초대받기, 개인적인 행복 누리기. 좋은 집, 화목한 가정, 멋진 휴가, 맛난 음식, 좋은 친구들.

어떤 사람들은 이 첫 번째 산의 정사엥 올라 성공을 맛보고 끝내 손에 넣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그리고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더 심오한 여정이 반드시 있음을 알아차린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사람들은 더는 산 위에 있지 않다. 이들은 당혹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의 계곡에서 헤맨다.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해 해준다.  또 다른 층이 엄연한 자기로 존재함을,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열망들이 살아 숨쉬는 어떤 기질이 실존함을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고통의 시절은 일상이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 whole person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인다.

고통을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한 사람들은 두 가지 반란 단계에 나아간다.  첫 번째로 이들은 자기의 이상적 자아(ego ideal- 한 개인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으로 만든 완전성을 갖춘 자아)에 반기를 든다. 자아의 욕구들은 자신이 자기 안에서 발견한 깊은 영역들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할 것임을 이들은 깨닫는다.  또한 이들은 주류 문화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진저으로 바랄 가치가 있는 것들을 자기가 바라기를 원한다. 

두 번째 산은 첫 번째 산의 반대가 아니다. 두 번째 산에 오르는 것은 첫 번째 산에 오르는 것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여정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들은 법률사무소를 팽개치고 티베트로 날아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장, 결혼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이제 자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명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더는 관리자로 보지 않고 멘토로 생각하며 다른 직원들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데 모든 힘을 쏟는다.  이들은 자기가 속한 회사 조직이 사람들이 그저 다달이 봉급을 받으려고 출근하는 얄팍하고 얕은 공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실팍하고 두터운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이 지금 첫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자아인가, 아니면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오로지 겸손함만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다.  혹시라도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그 짐의 무게로 등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지만, 이런 활동들이 그 사람에게 어떤 두드러진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데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나면 그냥 떠나 버린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조직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려서 영원한 어떤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초개인주의 hyper-individualism 문화 소에서 살고 있다. 자기 자신과 사회 사이의 긴장, 개인과 집단 사이의 긴장이 늘 팽팽하게 존재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균형을 잡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관계와 공동체와 헌신(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열렬하게 바라지만 초개인주의적인 생활 방식 때문에 늘 훼손하고 있는 덕목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사람의 모든 인생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공식은 없다(예를 들어 A는 두 번째 산을 첫 번째 산보다 먼저 올랐던 것 같다 - 개인적인 성공이 아니라 도덕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 

(소명, 천직으로서의 직업 vocation과 생계, 출세를 위한 일자리 job / career의 구별).

헌신이란 대가를 기대하지 않은 채로 무언가에 매진하는 것이다. 헌신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사라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순간들에 대비해 그 무언가의 주변에 어떤 행동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어떤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그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 결혼 상대를 결정하고 결혼 생활을 잘 꾸려가는 것, 인생 철학을 세우고 다듬어서 신앙을 경험하는 것,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번성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

대부분은 자기를 희생하는 인생을 올곧게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사례에 고무되는 것, 그리고 깊이 헌신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예전에 나는 개인주의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때 나는 개인주의를 단단히 붙잡기만 하면, 즉 자기 배의 키를 단단히 붙잡고 있기만 하면 인생은 점점 더 나아지고 최상의 수준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품격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토대로 해서 쌓아 나가는 어떠한 것이라고여전히 믿었다. 모든 의지력을 동원해 자기가 가장 약한 부분에서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격 형성이 개인 차원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더는 믿지 않는다.  근육을 키우듯이 정직성, 용기, 성실성, 끈기 등의 덕목을 키울 수 있다고 더는 믿지 않는다.  좋은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나 대의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사랑의 애착 관계를 두텁게 쌓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살피는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리듯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상적인 행동들 속에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인격은 갖추기에 좋은 것이다. 인격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배울 점은 많다. 그러나 인격보다 지니기에 더 좋은 것은 도덕적인 기쁨 moral joy이다.  이 평정심은 완벽한 사랑을 구현하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는 커리어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렇게 거둔 성공은 나를 특정한 인간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과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으며,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으며, 타인과의 의사소통 업시도 존재하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적어도 개인적인 삶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나는 인간관계의 의무를 회피했다. 내 인생의 온갖 실수와 실패 그리고 죄를 돌아보니, 하나같이 내가 가까이해야 마땅했던 사람들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성향의 것들, 즉 개인적인 차원으로 움츠러든 죄들이었다. 회피하고 얼버무르기, 일에만 파묻히기, 갈등 외면하기, 공감하지 않기, 그리고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표현하지 않기.  사람보다는 시간을, 인간관계보다는 생산성을 중시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런 습성은 내 인생에서 반복되고 있다.

죄의 대가는 죄이다. 나의 잘못은 차곡차곡 쌓였고, 그러다 마침내 우르르 무너졌다. 내 삶을 규정하던 실체들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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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목요일

from 도서 2018. 12. 26. 23:05
목요일                  허연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본 적 없는 生을 걷어내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모든 걸 다 고백한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
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
神을 만날 줄 알았지.
그림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투항과 
술을 마신다.
그중에 내가 있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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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K와 헤어진다면 내가 떠안고 있는 불안을 한 순간에 덜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잃는다는 상상 역시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 K야,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워.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점점 지름이 좁아드는 깔때기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아닐까. 의자뺏기 게임을 할 때처럼 흥겨운 노래에 취해 의자를 놓쳐버리면 아무 데도 앉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멀뚱하게 서서 의자에 앉은 아이들의 안도하는 얼굴을 바라보게 될까 봐 나는 몹시 두려운 거야.

- "그럼 나쁜 사람이구나."
"그래, 그놈은 나쁜 놈이라니까, 아주."
"그런데 그 애가 나쁜 놈이면 안 되는 거니?"
"...."
"이제 아무것도 아닌거야, 모두 지나간 일들이니까."
"그래, 그건 나도 알아."

Y에게, 나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잔인한 일 같았다.

"누군가 다른 여자가 있었다 치자, 없었다면 달라졌을까?"
"...."
"괜찮아?"
"나한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과거가 뭘 말해줄 수 있겠니? 뭘 증명할 수 있어."
"지나간 일들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진 마."

나는 결국 말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내 고통이 중요했다.

-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때 K가 느꼈던 느낌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해 그 가을에, K와 나는 각자 무엇에선가 달아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서로에게서 벗어나면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불안한 기운에서 달아날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도.
나는 K를 원했지만, 한편으론 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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