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진 - 사랑의 이해

from 도서 2025. 3. 11. 22:39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여전히 10시간 넘는 영상물을 볼 심적 여유가 없다, 혹은 가성비가 좋지 않다).  그런데 쇼츠에 자꾸 뜨는 미경(금새록)의 세련된 말투와 절절한 눈빛, 상수(유연석)의 툭툭 내뱉는 대사와 갈 곳을 잃고 헤메이는 동공에 호기심이 일어 버렸다...!

미경아 ㅠㅠ

그러다가 원작 소설이 있는 것을 알고 빠르게 읽었다.

소설은 두 학번 선배가 술자리에서 풀어주는 썰처럼 투박하고 거칠다(대본집을 조금 봤는데, 드라마 대본을 쓰신 분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대본이 훨씬 촉촉하다).  그런데 엄청 잘 읽힌다.  후술하는 인터뷰에서처럼, "최대한 걷어"냄에 따른 빛과 그림자일 것이다.  2020년대 서울을 살아가는 소위 혼인적령기 남녀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배경 및 캐릭터 설정은 발군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함께 서강대 캠퍼스 - 신촌을 거니는 착각까지 들 정도로 몰입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핸드폰 e-Book 어플로 본 첫 소설이기도 한데, 이런 가벼운 소설은 웹소설 읽듯 핸드폰으로 읽기 좋은 것 같다.  유튜브 쇼츠에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는 버거운 어떤 순간에 최적화된 듯.  앞으로도 애용할 것 같다!!


- 수영은 잔인하면서도 매력 있게 웃었다.

- 정말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요.  섬세하면서 담대하고.

- 제가 덜 미안하고 더 고마울 것 같아요.  수영은 '더'와 '덜'을 강조해 말했다.

- 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점장이었다.  꼬투리 하나 없는데 그런 기대감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수영 자신이었다.  줄 듯 할 수 있는 것은 지점장의 유력 때문이었고 안 줄 것을 알면서도 줄 듯 할때마다 입을 뻥긋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무력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 그래서 더 아프고 굴욕적인 위압, 모멸감, 창피스러움.

-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중략) 선택인 듯 보이지만 실은 모두 궤도 위에 이미 존재하는, 안전하고 예정된 과정의 매듭에 불과한 것.  후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  미경은 사 온 것들을 정리하며 자기가 준비할 테니 일단 씻고 한숨 돌리라고 말했다. 상수는 잠깐 생각한 후에 같이 만들고 같이 먹자고, 그런 다음에 같이 쉬자고 말했다. "그럴까, 그럼?" 무덤덤한 척 말했지만 미경의 입술은 기분 좋게 끝이 올라가 있었다. 상수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럴 때 왜, 미경은 그냥 같이 하자고 말하지 않을까. 배려하는 사람이면서 배려받는 사람도 되고 싶은 걸까.

-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버티고 견뎌 내야 했다.

- 지평선은 면도칼로 그어 낸 것처럼 깨끗했다. 멀어서 보이지 않는 먼 곳이 편안했다.

 - 좋아할 수록 많은 것이 보이지만 그만큼 못 본 척 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늘어난다.  상수는 그것을 처음 안 듯 느꼈다.

- 매일 돈을 만지고, 돈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어떤 한숨에서는 묵은 지폐 뭉치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상수는 미경에게 잘 대해 줬다.  하나 하나 귀담아듣고 작은 말, 몸짓 하나에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반응했다.  피식 웃어 넘겨 버리거나 못 보고 못 들은 척 무시하거나 여자는 왜 그러냐는듯 한심한 얼굴로 보던 것을 더는 할 수 없었다.  미경이 코를 찡그리며 웃을 때, 그것이 더는 미워 보이지 않았다.  사랑해서, 사랑받고 싶어서, 더 사랑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종이에 베인 손끝의 통증처럼,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경이 사랑은 아니었다. 5천원 짜리 같은 은행일 조차 그렇지 않게 해주는 사람은 수영이었다.  궤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도 가 보고 싶게, 갈 수 있을 것 같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도 수영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설명할 수 없지만, 자신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다 겪은 뒤에야 알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이제서야.  후회도 탄식도 아닌 쓰고 저린 감각이 마음의 낮은 곳에 고였다.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상수는 미경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때는 이제 지나 있었다.  미경과는 돌이킬 수 없이 헤어지는 수 밖에 없었다.  미경을 위해서라는 말 따위는 버려야 했다.  비루하고 비열했다면 끝까지 비루하고 비열해야 했다.  모두 자신이 쏟아낸 오물이었고 뒤집어쓰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 "당장 폐차시켜야 할 쓰레기들 빼면 남자는 두 가지야."
"뭐냐고 물어봐 줄게."
"핸들 없는 새 차, 핸들 있는 중고차.  결혼하면 자율 주행 기능이 생기는데, 진화 속도를 감안하면 전혀 신뢰할 건 안돼.  핸들 꽉 잡고 타면, 어지간하면 탈 만해.  가끔 쳐박기도 누가 와서 쳐박을 때도 있지만.  상수는 핸들 있는 중고차는 돼.  연식도 나쁘지 않고."

- 시간이 흐를 수록 수영 때문이 아니라 미경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순전히 사랑해 준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게 웃는지 가르쳐 준 사람.  수영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미경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수영은 가진 것이 없으므로 잃을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선택했다고 여겼지만 기실 미경이 수많은 여자 중 자신의 여자가 되어 준 것이었고, 그런 미경을 자신은 영영 잃어버린 것이었다.  함께 보낸 2년이라는 시간까지.  미경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준, 운 좋게 가질 수는 있어도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는 없는 사람.  자기가 좋은 사람이 못 됐기 때문에 결국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  싫고 서운했던 것들은 다 잊어졌지만, 좋고 잘해 준 것들은 잊어지지 않았다.  상수는 미경이 선물해 준 파자마를 버리지 못했다.

- "이제 갈까?" 상수가 말했다.  "저기, 저쪽까지만 한 번 갔다가 가자." "저기가 어딘데? 하와이?" "작작 해."


한겨례21 인터뷰 발췌: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43594?sid=103

- 그에게는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이’가 작가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스탠드업에서 혼자 1시간 넘게 단막쇼를 선보이는 코미디언들. 특히 흑인 데이브 셔펠,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트레버 노아, 인도 이민자 2세인 하산 미나지 같은 소수자 코미디언이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 등을 날카롭고 재밌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에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한마디, 한마디를 엄청 계산해서 (관객에게) 던지잖아요.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이 의미 있는 칼럼 같기도 해요. 무대 위니까 관객이 지루하면 안 되잖아요. 관객을 속일 수도 없고요.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로 층을 만들어가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고, 다시 (앞의 이야기를) 일깨워서 카운터펀치를 날리기도 하고요. 그런 구성을 하는 이 사람들이 작가죠.

이야기의 힘이 ‘구성’과 ‘배열’에 있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3년 잡지사, 조선소, 또다시 잡지사로 이어진 5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은 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남들이 안 쓰는 단어를 찾아내 쓰고 문장을 꾸미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책 한 권을 채울 수 없었다. 내용보다 표현이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걷어냈다. 더 쉽게 더 잘 읽힐 수 있도록. “작가 김훈의 작품이 죽여주는 것은 순서잖아요.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전혀 다르죠. 배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 회사원이었을 때, 어떤 때는 불합리했고 어떤 때는 답답했고 어떤 때는 이득을 봐서 괜찮아 보이기도 했던 일이 있었어요. 각각 떨어진 사실들로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어떤 흐름이 생겼어요. 또 그 흐름에 비춰 다시 현실을 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는 것들이 생겨났고요.

- 일로 현실감각을 얻는다는 건 자신의 본모습을 잃거나 감추며 부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존재를 가난하게 만드는 노동의 고달픔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누운 배>) “은행 생활이 너절스럽게 느껴졌다. 5만원권, 1만원권도 못 되는 일, 기껏해야 5천원짜리나 될까 말까 한 일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닌가.”(<사랑의 이해> 중)

- 복싱에 재미를 붙이며 글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6일. 사람이 덜 붐비는 카페로 나와 4~5시간씩 일하고 2시간씩 운동한다. 물론 일상은 규칙적이되 글은 불규칙하다. “한두 문장이 딱 걸리면서 죽죽 써질 때”는 신이 나다가도 “머릿속에서 (인물이나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만 많이 오갈 때”는 한 문단도 써지지 않는다. 그럴 땐 노트북을 접고 샌드백을 치러 간다. 복싱이 몸에 익듯, 생각이 익는 순간을 기다리며.

- <사랑의 이해>의 긴장감은 <누운 배> 못지않다. 역시 힘이 작용하는 ‘관계’ 때문이다. 힘의 방향은 일방적이지 않다. 늘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때로는 아래가 솟구쳐 위와 충돌하는 힘도 그려진다. 유난히 계급이 다단계인 은행이라지만, 사랑은 돈과 욕망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므로. (중략) 책 제목은 사랑의 이해(理解)이자, 사랑의 이해(利害)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계급사회에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어요. 반대로 사랑 같은 감정도 존재해서 충돌이 일어나죠. 그걸 (잘) 보여주기 위해 계급을 생각한 거고요.

- 마지막까지 심리 묘사를 고민했던 인물은 남자주인공 상수다.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연봉을 받는 정규직 은행원이지만 학벌과 직장을 빼고는 집안도, 사회적 입지도 보잘것없는 남자. 그래서 출세와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는 미경과 연인이 되지만 미모의 비정규직 텔러인 수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을 시선과 말로 핥아대는 남성 동료들을 혐오하면서도 모른 체하는 남자. 이혁진 자신 같기도, 보통의 한국 남자 같기도 해서 오히려 그려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저도 상수 같죠. 한국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길러진 면도 있고요. 적극적으로 순응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고, 그러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군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 부분을 더 일깨우고 싶었어요. 다들 ‘나는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다’ ‘솔직하다’고 하는데, (소설로) 자신을 떨어뜨려놓고 보면 진짜 보기 싫은 짓이거든요. 저도 쓰면서 되게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어요. ‘상수야, 너 누군지 알겠는데, 너 어떡하냐’고요.(웃음)

-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의 가장 큰 비참함은 가난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제가 가난 말고 다른 걸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소설이었거든요.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 사람의 인식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해주는 것이 소설이라 생각해요. 그러려면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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