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만의 출근 전날 저녁 730.  복귀를 알리는 메일을 짧게 썼다.  바로 보낼지, 출근 당일에 보낼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전날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나, 배당이 아침부터 이루어 지는 점(그룹장님이 비교적 일찍 출근하시는 점)을 고려하면, 내가 약속한 복귀일 아침부터 fully available한 게(복귀 사실을 그룹장이 빨리 인지하도록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 10~11시 쯤 느즈막히 보내서 한참 업무에 몰입할 오전 시간에 수신인들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고,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근무 형태를 허용해 준 회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이미 이러한 생각들이 스쳤음에도) 불과 몇 시간을 편하게 보내자고 다가올 현실을 회피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메일을 보낸 후 불과 1시간 만에 바로 전화가 오고(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바로 회신해야 하는 메일이 우다다 오는 광경을 보니(전혀 복잡한 이슈는 아니었으나, ASAP인 건이 잡혀서 출근 첫날 오전조차도 내가 상상한 그림대로 흘러가지 않음), (i) 평온한 저녁의 진공 상태(3일 내 hard deadline이 없는 상태를 나는 진공 상태라고 명명했다 진공 상태인 채로 수면을 취하는 것과, 고민을 안은 채 잠드는 것은 경험상 제법 차이가 있음)가 깨진 것에 대한 불만, (ii) 매우x100 귀찮음(굳이? 나를?), (iii) 보상 체계와 동떨어진 책임감의 가치에 대한 고민(자기만족 아닌가?), (iv) 아주 매우 정말 지극히 미세한 자기효능감과 지적 호기심이 섞여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거듭 너무나 미안해하시는 선배님들 때문에 묘함이 더 증가되었음).

급한 메일을 쳐낸 후에는 슬픈 기분이 들었고, (실제 working hour 1시간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일을 해야 했고 또 해야 한다는 사실에) “굴레” “속박등의 자기연민 가득한 용어로 머리가 가득해졌다.  떼잉.. 이 정도로.. 많이 나약해졌다는 생각과 동시에, 지난 4개월은 공백기가 아닌 회복기가 되어야 했음을 상기했다어차피 당분간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성장이 전제된) 항상성의 추구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스스로의 회복탄력성 유지를 위해 자체 검증된 몇 가지 조치가 있는데, 물리적 회복을 위해서는 마사지/운동(달리기/테니스, 정 시간이 없으면 따릉이 귀가), 정신적 회복을 위해서는 몰입하여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일련의 활동이 필요하다.  3년차 이후 정도부터 만들어온 패턴이고, 많이 익숙해진 터라, 기계적으로 금호아트홀/세종문화회관→시네큐브/에무시네마→서울시립미술관/국현미 정도(+ 연습중인 곡이 있다면 E연습실)를 검색한다[필요한 회복의 유형이 애매하거나, 그저 답답할 때에는 위스키도 추가할 수 있는 옵션/취향이라고 생각하여 몇 군데 후보군(78도 덕수궁, 청파랑, 오무사)을 추려 놨는데, 막상 가보지 못함].

서론이 미친듯이 길었는데, 마침 아래와 같은 공연을 발견!

 

Paul Lewis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무했으나(이름이 너무 흔하기도 함, 혹자는 영국의 피아니스트 김영수라고 ㅎㅎ),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는 최애 레퍼토리 중 하나이고, (출근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시 퇴근 후 공연을 즐겼다는 사실만으로) 복귀 첫날을 좋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냅다 예매했다.

결론적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intermission 때 찍힌 캐치콜 2통을 보고 좌절하여 여운이 많이 깨졌던 것, D.960에서 회복하여 집에 뛰어와서 당일 여운을 생생하게 블로그에 남기고 싶었음에도 여의치 않았던 것은 잠시 잊자.. ㅠㅠ).  작년에 김도현, 문지영 등 슈베르트를 훌륭하게 소화한 호연을 많이 봐서 기대치가 낮지 않았는데,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입장시 홀에 가득한 박수가 끝나기도 전에 건반을 닦거나, 손을 풀거나, 의자를 조절하는 등의 불필요한 동작 없이, 바로 내려꽂히는 타건감부터 극호감이었다. 

D.958은 계속하여 장면과 감정이 바뀌는 입체감(1악장을 예로 들면, 아래 문지영 영상 기준 6:22~6:25 정도에서 최고로 고조시켰다가, 단숨에 가라앉히는 부분, 7:55 정도에서 쭉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부분, 8:06~8:08 부분, 9:20 부분, 10:23 심연을 울리는 듯한 부분 등 문지영 피아니스트는 전체적으로 비단결같은? 몽환적인 느낌이 강한데, 폴 루이스는 강약 대비가 훨씬 심했음), 30분 내내 정말 몰입하여 정신없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것 같다.  왼손 멜로디 부분이 선명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개인적으로 허밍조차도 몰입도를 향상시키는 요소였다. 

 

F. Schubert Piano Sonata No.19 in C minor, D.958(문지영)

 

다음은 D.959.  그날 최고의 호연으로 꼽는 것 같은데, 나도 전혀 이견이 없고, 이 순간을 잊기 싫어서 평소에 절대 안하던 현장CD 구매/사인회 참석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아프고 슬프고 화나는 그런 감정이 시종일관 아름답게 꽂혀서 진짜 좋았다(월간 객석의 보다 고급진 표현을 빌리면,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비르투오시티의 발현이 특징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스케일의 확장과 축소를 순발력 있게 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F. Schubert Piano Sonata No.20 in C minor, D.959(임동혁)

D.960도 좋긴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D.959가 베스트였음.

커튼 콜 때 사진 안찍는데 너무 황홀한 기분이었어서 남겨 봄.  기립박수 숫자도 엄청났고 피해서 찍는다고 했는데 이 정도임.

싸인회도 대성황..

싸인회에서도 한명 한명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시고, 악보 가져간 전공생들에게는 질문도 해주시고, 셀카도 찍어주시고, 진짜 인성마저 훌륭했던 완벽한 그 ㅠㅠ 나도 여러 질문을 준비했다가 수줍게 땡큐베리마치 남기고 퇴장..

집에 오는 길에 슈베르트의 여운이 너무 남아서 가장 좋아하는 방랑자 판타지를 듣는데, ..? Lewis?

세상에, LewisPaul Lewis였던 것이다.  Claudio Arrau 해석보다 1.5배 빠르고, Evgeny Kissin보다도 강렬하여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해석인 이 유투브 영상의 주인공을 내가 보고 온 것이었다 ㅠㅠ

제일 좋아하는 곡의 제일 좋아하는 연주자를 보고 온 날이라, 집에 가는 내내 여운이 남았고, 정말 행복했던 하루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더 휘발되기 전에 끄적여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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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 법이다.

- 죄수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옆의 죄수다.

- <늑대들의 햇님>이란 그의 고향에서 달님을 가리킬 때 하는 말이다.

- 흙손으로 모르타르를 고루 펴 바르고, 그 위에 벽돌을 빨리 올려놓는다.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재빨리 흙손 자루로 두르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바깥쪽 벽이 수직선에 맞게 오고, 옆으로나 수직으로나 기울어진 데가 없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젠 됐다. 두층만 더 쌓으면, 예전에 잘못 쌓아놓은 곳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훨씬 수월하게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지금은 정확하게 잘 살펴야 한다. 슈호프와 다른 벽돌공들은 아예 추위도 잊어버렸다. 빨리 일을 하느라고 서두르다 보니 몸에 땀이 다 날 정도로 더워진다. 

- 죄수들에게는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춥고 배고플 때이다.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춧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 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뭣 때문에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 거죠? 만일 자유의 몸이 된다면, 당신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셔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제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수모를 견디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담고 있는 책”이자 “고통스럽고 남루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켜가는가. 인간의 품격과 인간다움, 이런 것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켜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하는데(유시민), 그렇게 와닿는 설명은 아닌 듯 하다.

나는 오히려 (나의 경우야 자발적이지만)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 과업을 성취하면서 역설적으로 느끼는 순수한 기쁨에 주목하였다.  뭔가 평생 편안한 자신의 감옥 속에서 벽돌을 쌓으며 즐거움을 느낄 것 같은 이 기분... 여기까지 오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황을 오히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전신마취가 수반되는 수술을 하고 예능을 하루 보니까 바로 지루해졌고, (복잡하지 않은 것만 취사선택하여) 메일 회신을 하며 편안함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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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를 지배한 아이콘 중 하나는 홍상수였다. 내가 느끼던 막연한 불안, 우울, 내지는 선한 가치에 대한 반역적 시선(진정한 사랑이란?)을 이토록 잘 구현한 감독이 또 어디 있던가? 그가 스스로 말하듯 그의 영화는 인생의 한 사이클을 산 사람, 20대 후반 이상을 타겟으로 하는데,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인생(특히 남녀관계/감정)의 어려움을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이해하고, 나름대로 풀어냈다(교과서를 잘못 고름).

하지만 30대가 되고 조금씩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의 영화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안정적인 생활,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할수록 그의 영화나 메시지가 내포하는 불안정성(내지 그 미화/정당화)을 견디기 어려워진 것이다. 설령 그의 영화나 메시지에 공감이 된다 하여도 그건 주로 내가 지우고 싶거나 부끄러워하는 스스로의 단면에 닿아 있었기에, 어떻게든 제도권 안에서 몸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다가 고 이선균 씨의 부고를 친구의 입을 통해 嵐電 정류장에서 우연히 전해듣고, 문득 다시 보고 싶어져서 이 영화를 꺼냈다. 30대 후반이 되어, 반 발짝 떨어져서 보니, 내가 갈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고뇌했던 감정, 관계의 실체가 조금은 더 선명히 보이는 것 같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이선균이나 홍상수의 선택을 할 수 없는 – 할 용기가 없는 - 사람이므로 여전히 홍상수의 영화와 거리를 두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종종 생각날 때면, 권태에 대한 정당화 기제가 필요할 때면, 아니면 불안한 예감에 대한 선험적인 시각화를 원할 때면, 가끔 찾아볼 것 같다(가급적 위로와 공감을 얻어서는 안될 것이다).

영화에 대한 평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언어를 구사하는 한겨례 기사로 대체.

https://www.hani.co.kr/arti/culture/movie/617895.html

인간이라는 딱하고 예쁜 존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올해의 영화 1위에 올랐다. 꿈과 현실이 동등하고 정연한 배치로 흘러가며 만드는 리듬과 정서가 아름답다. 애처롭고도 씩씩한 젊은 여자가 삶에서 그리워하는 것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홍상수가 냉소주의자가 아니라 인간을 딱하고 예쁜 존재로 바라보는 작가라는 사실을 어떤 전작보다 분명히 깨닫게 해준다.(김혜리)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선정한 지지자들을 대표할 만한 평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애상의 감정이 유독 깊은 영화로 손꼽힌다. 젊고 씩씩하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소망도 많은, 해원이라는 젊은 여성 캐릭터가 겪어내는 그 감정의 모험극이 진한 여운을 전한다는 의견도 많다.
 
영화 속 꿈과 현실을 동일 질감으로 오가며 만들어낸 그 새로운 미학적 성취에 대한 찬사는 더 말할 것이 없다. 해원을 통해 드러내는 홍상수의 기하학적 청사진. 시공간을 뛰어넘는 통쾌함과 청량한 감상이 주저없이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게 만든다.(이지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는 시간을 견디고 반복하고 다시 감각하기 위해 애쓰고, 그런 자신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동안 홀로 외롭고 슬프고 무서웠으나, 적어도 죽음에 지지 않았다. 한없이 서글프지만 결국은 죽음에 지지 않는 영화. 홍상수의 열네 번째 영화는 그렇게 또 한번, 또 다르게 생을 깨어나게 한다 (남다은) 등의 평들이 제출된 바 있다.
 
그러니 그 말들을 따르자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꿈과 현실을 아름답게 잇고, 죽음과 용기 있게 대면하고, 생을 새롭게 두들기는, 불가사의한 영화다. 그로써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올해의 영화 1위가 된 것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주인공 성준과 이선균 씨를 대조하며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Movie Quotes:

*

진주(김자옥): 공부는 잘 하고 있지? 학교에서

해원(정은채): 엄마, 용기를 학교에서 배우는 줄 알아요? 다 똑같애. 사는거야 그냥.

진주: 그렇구나

 *

해원: 난 캐나다가 엄마한테 좋았으면 좋겠어요.

진주: 그전에 한 번 가본 적 있어. 나 거기 가서 내 마음대로 하고 살거야. 맨발로 길거리도 막 걸어다니고, 길거리에서 막 춤도 춰보고. 거기서는 다 할 수 있어. 정말이야.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 볼거야

해원: 엄마 맘대로,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아요.

진주: 너도 그래. 사는 건 죽어가는 거야. 하루하루 조금씩 죽음을 향해서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나처럼 살지 말고.

해원: 그렇게 살고 있어요.

*

해원: 오랜만에 비맞고 다니니까 좋네요. 오랜만이에요 진짜 비맞는거.

성준(이선균): 어 그래. 비맞으면 갑자기 딴 세계 온거 같지. 그지

(중략)

성준: 옛날에 내가 좀 미쳤었거든. 근데 오늘은 니가 좀 그런거 같다 야

해원: 선생님 내가 미친 것 같아요?

성준: 어? 아냐 아냐. 너 너무 예뻐. 너무 예쁘네 진짜.

해원: 나 선생님 보니까 저도 좋아요

성준: 너 왜 이렇게 예쁘니

해원: 왜 그래요 뻔뻔하게

성준: 뭐뭐 내가 뭐

해원: 정말 미쳐본 적 있어요?

성준: 어. 그런 것 같은데

해원: 선생님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성준: 뭐가 좋아 그게

(해원 문화재 파괴)

성준: 야 여기 들어가면 안될 것 같은데

(중략)

해원: 오늘만 같이 있어 줘요. 내가 힘이 좀 들어서 그래요.

성준: 알아.

해원: 술 한잔 하러 갈까요?

성준: 술 좋지.

해원: 술 마시고 싶죠?

성준: 어. 다 하고 싶어. 너랑은 다 하고 싶어.

해원: 허. 웃겨. 술만 해요 술만.

성준: 예쁜 새끼가 진짜. 사람 미치게 하려고 진짜

해원: 쳏 웃겨..

(위엄있는 동상 등장)

해원: (동창들에게) 내가! 오늘 엄마가 떠났어 캐나다로 가셨거든. 그래서 많이 슬펐어 그래서 내가 감독님 부른거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게 진실이라고. 믿든 안믿던지. 암튼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

해원: 아빠가 나 어렸을 때 7년을 외국에서 일했거든요.

성준: 그래서 니가 다른 애들하고 좀 다른 것 같애.

해원: 뭐가 달라요?

성준: 아 그니까.. 너도 살라고 머리 쓰거든. 쓰는데. 좀 덜 머리 굴리는 것 같애.

해원: 나 악마에요.

성준: 악마야?

해원: 네. 악마에요.

성준: 니가 뭐가 악마야.

해원: 고마운데 선생님이 좋게 보는거에요.

(중략)

해원: 왜 그렇게 슬퍼 보여요?

성준: 옛날 사람들. 여기 성벽 쌓아올리고. 여기서 먹고 자고 했을 거 아냐. 하이고, 이게 다 뭔 소용이 있다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참. 아무도 이제 기억도 못하잖아. 아무 것도 없는데.

해원: 여기 돌들 남았잖아요.

성준: 그래 돌은 남았지. 이게 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쌓은 거잖아.

해원: 하나씩 하나씩 어떻게 쌓았을까 이 산 위에까지.

성준: 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거야.

해원: 나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성준: 그래. 아니다, 그래도 세 개는 남겠다. 내 새끼하고, 내 영화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기억.

해원: 많이 남기네요.

성준: 그게 많아? 아냐 너도 똑같이 남길거야. 사람들이 널 기억할거고. 그러고 나중에 너가 결혼하면 애도 낳을 거고.

해원: 안남길거라니까요. 선생님 혼자 많이 남기세요.

성준: 알았다. 그래 그럼.

해원: 가요.

 *

성준: 이거 뭔지 알아?

해원: 뭐에요?

성준: 사직서야.

해원: 그만 둘라고요?

성준: 그만 둘까?

해원: 농담이에요? 사직서네..

성준: 아침에 써봤어 그냥.  그냥 써봤어.

해원: 이거 낼거에요?

성준: 그냥 써봤어. 새벽에 일어나가지고 그냥 써봤는데, 웃긴 게 눈물이 좀 나는 것 있지 진짜 빙신같이. 식구들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한거야.  돈도 못버는 놈이 앞으로 뭐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찢어버릴까?

해원: 잘 생각해서 하세요. 생활은 해야 되잖아요. 애기도 있고

성준: 알아. 그냥 최악을 연습해 본거야 마음으로.

해원: 선생님 잘못한 것 없어요.

성준: 널 좋아했잖아.

해원: 좋아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성준: 내가 미쳤나?

해원: 먹을 걸 싸올 걸 그랬나봐요.

(중략)

성준: 우리 잘하자.  그래서 오래오래 보자.

해원: 그러고 싶어요.

성준: 우리만 잘하면 돼.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 들키지만 않으면 돼. 전에 있던 일은 아니라고 끝까지 우기면 되는거야. 자기들은 증거 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

해원: 선생님.

성준: 어?

해원: 비밀은 없어요.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모르세요? 비밀 없어요. 결국 다 알아요.

성준: 그럼 어떡하니?

해원: 다 죽으면 돼요.

성준: 하하하! 아이 시끼 말하는거 봐 쪼끄만게. 넌 어쩜 이렇게 예쁘니?

해원: 선생님도 이뻐요.

성준: 사랑해.

해원: 이상하다, 그 소리 들으니까.

성준: 사랑해 정말

해원: 나도요.

해원(독백): 거기서 그만 갈 걸 그랬다.

*

성준: 이런 씨발 좆 같은!

해원: 알았어요 욕하지 마요. 욕하면 무서워.

성준: 뭐 씨발! 좆같애가지고 진짜.

해원: 무섭다 그랬죠!

성준: 뭐 욕이 어때서! 니가 한게 얼마나 더러운 줄 몰라?

해원: 뭘 더럽다는 거에요?

성준: 진짜 너가 한게 뭔지 몰라?

해원: 몰라요!

성준: 뭐?

해원: 당신 맘이 더러운 거겠지.

*

도서관에서 잠든 해원이 보던 책 / 국문 번역: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문학동네, 2012)

*

정원(김의성): 사세요. 저도 아까 그냥 물어봤는데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된대요 이거.

해원: 그래요? 그런데 그럼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해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원: 해원씨가 좀 비슷한 것 같은데요?

해원: 네? 농담하시는 거에요? 뭘 아신다고요 저에 대해서

정원: 꼭 오래 봐야지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겉으로 다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해원: 뭐가 보이시는데요?

정원: 해원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안으로는 제일 용감한 사람인 것 같아요. 뭔가 힘이 너무 강해서 계속해서 부닥치면서 되게 아프고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계속 부닥칠 것 같아요.

해원: 그래요?

정원: 그래야지 자기가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계속 부닥치는거죠. 알고 싶은거죠 자기가 누군지. 그런데 그 부닥침의 강도나 지속이 대단할 것 같아요. 그건 뭐랄까 절대적인 진실 같은 것을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체험하고 싶은거 그런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보고 있으면.

해원: 그런 사람이 좋으세요?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정원: 아뇨.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있는게 필요해요. 뭔가 내가 망가뜨릴 수 없는 강한 개성 같은 그런게 제 옆에 있는게 저한테는 필요해요.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 건강한게 행복한 거잖아요. 네. 저한테 정말 그게 필요한 것 같아요.

해원: 아늑하네요 이집.

 *

중식(유준상): 깃발 참 멋지네. 어. 너무 단순한데? 너무 멋진 것 같애. 야 깃발은 참 정말 멋진 발명품이야 그지?

연주(예지원): 그것 때문에 바람이 보이잖아요 눈에.

 *

성준: 나, 더 이상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할 것 같애. 집에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못견디겠어. 학교 애들도 눈 못 마주치겠고. 너 정말 나랑.. 나 사랑하니? 너 너무 사랑하거든? 우리 어디로 가버릴까? 아무도 없는 데로?

해원: 어디로 가요 우리가 어디로..

성준: 강원도 같은 데.. 거기 내가 아는 신부가 있거든

해원: 선생님 잘못이에요

성준: 뭐?

해원: 우리 맨 처음 자고 나서 그게 끝이라 그랬잖아요. 그때 얼마나 좋았어요. 근데 선생님이 다시 전화했잖아요. 그때 전화하지 말았어야 해요

성준: 그래 내가 잘못한거고.

해원: 네 선생님이 잘못하셨어요. 원하는거 다 어떻게 하고 살아요. 왜 왜 다하려고 하세요.

성준: 다하려고 한거 아니야. 너 사랑한 것 밖에 없어.

해원: 사랑한게 아니라 내 생각을 안한 거겠죠.

성준: 꼭 그렇게 얘기해야 되냐?

해원: 너무 힘이 들어요. 너무 힘들면 아무도 못참아요. 아무도 못참아요. 선생님은 안힘드세요?

성준: 뭐하자는 거니 우리 지금

해원: 헤어져요. 헤어질 것도 없겠지만. 선생님 하나도 포기 안하려고 하시잖아요. 저도 잘 살고 그냥 그럴래요.

성준: 그래. 잘 살아라. 미안. 내가 인사하고 갈게.

해원(독백):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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