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from 카테고리 없음 2013. 9. 22. 12:51

자그마치 07년 6월에 사고와 표현 I 과제로 제출했던 죄와 벌 독후감....

내가 이런 글을 썼었구나 싶기도 하다. 다시 봐도 어설프지만 이 때 느꼈던 감정같은게 되살아나서 좋았음.


죄와 벌

2007110188 윤재훈

 범죄를 용기 있는 행위라고 치부하던 시기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경쟁사회에 내던져져 결과 중심의 평가를 받으며 살아오던 나에게 어쩌면 범죄는 목표를 향한 지름길의 하나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동일 시간 노력을 한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컨닝을 한 자가 결과적으로는 더욱 우수한 자로 취급받았고, 이런 결과적 우세는 과정마저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보였다. 실제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부정행위의 대부분이 적발되어 불이익을 받을 확률보다 결과론적으로 칭송받을 확률이 더 높은 현실은 나를 쉽게 상황에 순응하도록 부추겼다. 이와 관련하여,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 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영호가 양심과 윤리에 대해 조롱하는 부분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그건 나이롱 빤쯔 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법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구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해요.)

더구나 부정 행위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요소나 상황적 이유가 개입된다면 더더욱 정당화될 소지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왜곡된 가치관은 왜곡된 사회 속을 살아가면서 더욱 더 합리화되는 듯 싶었다. 전체가 왜곡되어 있다면 그 속에서 곧은 것은 왜곡된 질서에 반하는 것이 되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읽은 후 전기를 맞게 된다. 사소한 범죄와 가벼울수록 편한 양심이 주는 즐거움에 기대어 살 무렵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공 요코는 아버지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자신이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살인범 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은 상황적 불가피성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를 자신의 원죄로 치부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주인공 요코의 모습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의 빙점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다, 라고 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 내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 홀연히 잠을 깼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 자신의 죄의 깊이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 많은 자다’ 라고 하는 죄의식이 가차없이 저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 나는, 죄가 있는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참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추악함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것이 싫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에겐 죄 혹은 부정 행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자체가 없었다. 부정이라는 것이 굳이 정의하자면 사회가 만든 선을 넘는 것인데, 사회가 올바르지 않은 이상 정(定)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며, 오히려 그 선을 넘는 것이 다양성을 구현하고 사회의 변증법적 발전을 꾀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고 있을 시기였다. 하지만 주인공 요코가 자살을 하며 남긴 편지들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사소한 행동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선량한 그네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추악함과 죄의식에 몸서리치게 놀라기도 하고 반성도 많이 하였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내적으로 벌을 받는다는 느낌을 가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듯 내 인생 속에서 ‘죄’, 그리고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벌’ 이라는 개념은 주요한 화두로서 자리 잡아 왔으며, 법과대학에 진학한 지금에도 이와 관련된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온갖 범죄 그리고 불법 행위와 마주해야할 예비 법조인이 되어, 나는 뒤늦게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불후의 명작 『죄와 벌』을 접하였다.

소설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방에서 시작된다. 서막인 제 1부에서는 병적 상태 속에서 그의 추악한 사상이 무르익어 실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속에 내재하는 불의를 보고 그 원인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다.

(<비범한 사람>은 어떤 장애를 넘어서는 걸 자기 양심에 따라 스스로 허락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공적인 권리라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그건 자기의 사상- 때로는 온 인류를 위한 구세적 의의를 지닌 사상의 실행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한하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만일 케플러나 뉴튼의 발견이 어떤 상황에 의해 한 사람의 생명을, 혹은 열 사람, 백 사람의, 또는 그 이상의 방해자의 생명을 희생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세상에 알려질 도리가 없다면, 그런 경우 뉴튼은 자기의 발견을 온 인류에 보급하기 위해, 그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의 인간을 <제거할> 권리가 있을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안될 의무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전인류적인 입법자나 지도자는 고대의 영웅들을 위시해서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멧, 나폴레옹 등등, 이런 사람들은 모두 예외없이 새로운 법률을 계정하고, 그걸 행함으로써 종래의 사회에서 신성시되어 오고, 조상 때부터 시행되던 낡은 법을 파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훌륭한 범죄자인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물론 자기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할 때는 유혈의 참변도 주저치 않았습니다. 설사 그 피가 때로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든, 낡은 법을 위해 용감히 흘린 것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들 인류의 은인, 지도자의 대부분이 특히 무서운 살육자였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은 누구든 새로운 걸 말하는 재주가 있기만 하면, 그 천성에 의해서 반드시 범죄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물론 다소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게 나의 결론입니다. 그렇잖고서는 결코 범속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범속의 궤도에 남아 있기는 역시 본래의 천성 탓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소설 속에서는 ‘범죄에 대하여’ 라는 논문으로 소개되는 그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은 범인과 비범인으로 분류된다. 비범인이란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을 일컫는 말로서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에게는 대의라는 명분이 있기에 필요하다면 인명의 살상도 가능한 특권을 지닌다. 반면 범인은 현재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소시민적 인물로서 번식을 통한 종족의 보존과 같은 동물적인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의 이론에서 범인은 비범인이라는 특수한 존재를 완성시키기 위한 한갓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 라주미힌은 이러한 분류 체계에 대해 ‘양심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명의 박탈을 합리화시키기에 더욱 무서운 것’ 이라고 일침을 가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일부 영웅들이 꿈꾸는 세상과 대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아니 소비되었던가. 영웅들의 빛나는 업적 밑에는 소리 없이 죽어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반 군중들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군중 관계는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변형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거대담론을 위시하여 인권을 유린하던 독재 정권의 잔재 등을 돌이켜 보건대 라스꼴리니꼬프 이론은 상당한 날카로움을 갖춘 것이다. 비단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그의 비범인 이론은 알게 모르게 통용되고 있다. 주요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 체계나 소설, 영화 등의 매체에서 소외당한 범인들의 모습은 얼마든지 목격 가능하다. 자신도 모르게 구분 체계의 틀 안에 구속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역동적 변혁의 실제 주체인 민중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은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얻는다. 특히 세상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꼬집고 이론으로써 체계화시킨 점은 높게 살 만 하다. 물론 인간의 생존권은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것이기에 살상이 정당화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사상이 위험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단점이 그 사상이 갖는 의의와 논리성마저 퇴색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사회악의 제거라는 측면에서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을 마냥 부정적인 것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사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라든지,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인도적, 당위적 명제에는 감성적으로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불행의 원인이라면 때로는 그 사람을 제거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악이라는 명목에 의해 역사적으로 죄 없는 피가 희생되는 경우도 다수 있으며, 현 사회에서의 부정이 다음 세대에서의 긍정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회악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여 방치하는 행위에도 부조리함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매우 극단적인 방법이라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은 이러한 사회악을 시정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 동기는 그의 이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물론 일상에서의 궁핍도 한 몫 한 것이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를 통하여 스스로가 초인적 존재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자문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단 라스꼴리니꼬프뿐만 아니라, 누구나가 스스로가 다른 자와 차별화된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물론 인생은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 나만의 언어로 그려져야 할 것이기는 하나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결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저지른 행위는 자기 현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한 발악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인행위는 결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노파의 죽음을 통하여 그는 스스로의 생명력이 쇠약해짐을 느낀다. 심지어 “아냐, 나는 나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를 죽인 게 아니야. 나는 단숨에 영원히 나 자신을 죽여 버린 거야!”라며 절규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를 지탱하던 이성 또는 논리의 허구성이 폭로된다. 사실 우연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범죄 인멸을 위한 노력도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그는 혐의에서 벗어나고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칠장이 니꼴라이가 철창에 들어갈 운명에 놓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스스로의 입을 다물고 평정을 되찾는다면 수사선에 놓일 염려가 없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혐의를 받고 있을거라 가정하여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증세를 보인다. 그의 범죄 자체는 그의 논리에 의해 어느 정도 처리되나 그 후의 감정적인 문제는 이성으로 해결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상황을 통해 양심 또는 죄의식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헌법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분명 자신의 논리 구조 안에서는 옳은 일을 했지만 스스로가 그 논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있다. 어쩌면 범죄 전에 그는 이러한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르고, 그의 범죄 행위 자체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살인 행위는 결국 그의 존재가치를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만다. 황폐해진 그의 영혼은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이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덕률을 뛰어넘지 못한 탓이다. 점점 커지는 의구심 속에서 그는 거짓과 은폐 일변도의 자세를 취하게 되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고 만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파멸 과정을 지켜보며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김시천 교수님이 쓰신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기주의를 정의할 때 대인의 이기주의와 소인의 이기주의를 분리시켜 설명하고 있다. 대인들에게 고전이 와닿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수님은 성인, 즉 대인의 이야기를 소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인은 소인 나름의 이기주의를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물론 생명 박탈과 같은 극단적인 부분이 없기에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분법적 분류체계라는 면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과 유사점을 지닌다. 인용한 책에서의 비유를 참조하여 다소 희화화시켜 말하자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소인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대인 흉내를 내다가 뱁새 가랑이 찢어진 꼴이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에서 크게는 무조건적 이성 맹신의 허구성도 발견할 수 있지만, 안분지족이라는 작은 교훈도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파멸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는 다양한 조력자가 있다. 헌신적인 우정으로 그를 감싸주는 라주미힌이나, 두냐, 어머니, 소냐 등은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된다. 자그마지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소설 속에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 이외에도 이러한 조력자들과 관련하여 생기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큰 맥락에서 몇 가지 살펴볼 것이 있다.

우선 두냐의 행위를 살펴보자. 두냐는 재정난으로 고생하는 오빠를 위하여 별로 사랑하지지도 않으면서 금전적인 이유를 근거로 신흥 갑부인 뤼진과 결혼하고자 한다. 이 혼담은 라스꼴리니꼬프의 극심한 반대와 그 과정에서 보여준 뤼진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결국 파국에 이르지만, 만약 일이 잘 진행되었다고 해도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두냐의 태도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극심한 재정난을 타개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어느 샌가 포기해 버린 채, 타인의 재물에 의존하여 자신을 버리려는 태도가 첫 번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기에 문제가 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사랑하는 사람의 무조건적 희생과 파멸을 통해 얻어진 조건을 통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냐의 행위를 통하여 두냐 자신은 자기의 행동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타인, 특히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행위인데, 하물며 나를 위하여 누군가가 파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누구에게나 무서운 생각이 들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히는 과정 자체에서 이미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결국 두냐의 행위는 현실적인 문제에 치중하는 바람에 라스꼴리니뇨프의 섬세한 감성과 자존심을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처사로 보여진다.

두냐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소냐가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선술집에서 마르멜라도프라는 알콜 중독자의 하소연을 듣게 되는데, 그의 딸이 바로 소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후에 마차에 치여 죽은 마르멜라도프의 장례를 도와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냐와 직접적으로 안면을 튼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성스러운 감정을 잃지 않는다. 소냐와의 대화 속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 행위를 소냐에게 털어놓게 되고, 소냐는 울면서 그를 버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따라가겠다고 한다. 소냐는 이른바 선의 결정체로서 존재한다. 소냐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고, 참회와 자수를 권유한다.

결국 소냐의 설득 끝에 자수를 하여 시베리아로 이송된 후에도 라스꼴리니꼬프는 생각처럼 쉽게 부활하지 못한다. 그가 낳은 사산아와도 같은 존재인 살인 논리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의 자수 행위 자체에서 부활을 강력하게 암시받지는 못한다. 살인 사건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자수 단계에서도 그의 문제적 이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자수는 참회 목적 혹은 양심의 가책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그쪽이 더욱 유리할 것 같다는 타산적 판단에 의한 결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악한 면을 따로 때어낸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을 택하나,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살마저 할 자신이 없는 소심하고 무능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해 보건대, 강력한 삶의 의지에 의한 자수라기보다는 당장 편한 길을 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소설의 가장 끝 부분에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의 발 아래 몸을 던지며 회개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미 라스꼴리니꼬프를 천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샅샅들이 들여다 본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황당한 결말이기도 하다. 물론 꿈이 동기가 되기는 하지만 이런 일련의 동기들이 살인 행위 당시의 그의 논리를 깰 정도로 정교하지는 못하다는 느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전인류의 파멸과 멸망보다는 개선과 교화를 꿈꾸기에 이런 결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정신적 소생은 소냐의 무제한적 희생만큼이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소재로 여겨진다.

이 소설을 잃으며 사회의 많은 부조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특히 모두가 다 잠재적으로는 갖고 있는데 깊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생각들을 되짚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단지 형법적 범죄 행위와 그에 따른 응보로서의 벌과 같은 삭막하고 틀에 박힌 개념과는 달리 심리학적으로 범죄 동기와 그에 따른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표현력에 경탄을 표하는 바이다.

또 죄와 벌, 양심에 대한 나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결과물들을 이룩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질 것이고, 스스로의 행위를 객관적 옳고 그름 여부와 관계 없이 이론과 논리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의 궁극적 파멸을 통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 과정에서의 정당성 또한 결과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사회가 왜곡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하여 나마저 왜곡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빼째르부르크가 환경적 범죄를 자아낼 정도로 타락한 곳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아있는 양심이 빛날 여지가 더 많지 않을까. 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낀다면, 부조리한 행동으로 그 사회에 맞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외롭지만 곧은 길을 살아보려 한다. 양심의 배반이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끌 수 있다면, 역으로 나의 전존재를 걸고 지켜야 할 삶의 자양분이 양심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나의 결심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걸려 독서한 만큼, 나에게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 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