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 사평역에서

from 일상 2016. 1. 15. 12:54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16.05.23
.  (0) 2016.02.17
.  (0) 2016.01.15
.  (0) 2016.01.10
.  (0) 201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