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 5년 동안 함께해줘 고마웠다. 굉장한 경험이었다. ‘일상사’ 연구라는 당신의 방법론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뤼트케 = WCU에 초청해줘 감사한다. 생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한양대에 와서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와 유럽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과 고민이 대등하게 만나는 비교문화연구소 같은 국제적인 연구소가 있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구 협력 모델을 이어가면 좋겠다. 나의 일상사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면, 박사논문이자 첫번째 프로젝트는 프로이센(독일) 경찰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법이나 규율이 상층부뿐만 아니라 하층부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평범한 경찰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보통 경찰에 관한 문서를 찾는 게 어려웠다. 경찰 정책에 관한 것들은 나와 있지만, 실제 경찰들의 한 일이나 기능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낮은 지위의 경찰은 높은 지위에 있는 경찰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위의 권력자들이 만든 자료만 보면, 어느 사회든 체제의 정치권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실천은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들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예컨대 각급 학교에서 부상의 우려 때문에 매년 눈싸움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말은 곧 아이들이 그 지시를 무시하고 매년 눈싸움을 했다는 말이다. 일상사 연구의 핵심 중 하나는 잘 안 보이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권력과 보통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임지현 = 일상사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에 입각한 역사연구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뤼트케 =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도 국가의 지배나 지배도구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심이다. 에드워드 톰슨이 1963년에 출간한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창비)을 보면, 공장이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간 같은 규율을 엄격하게 강요했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그런데 당시 노동자들의 일상사를 보면, 정시 출근을 하는 등 겉으로는 시간 규율대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근 15분만에 독자적으로 쉬면서 차를 마시곤 했다. 19세기 프러시아 같은 경찰국가나 노동 규율이 강한 곳은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노동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나가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도 했다. 회색 지대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이런 일상사는 산업화, 근대화에 들어간 사람들과 구조를 분석하는 역사학 쪽에서 잘 논의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많은데, 진짜 일상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사는 역사학보다는 사회인류학, 문화인류학쪽과 가깝다. 일상사 연구는 미국에서 먼저 발전한 이들 인류학 연구자들과의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류학 연구로부터 통찰력을 얻는 게 중요했다. 최근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역사인류학 연구소에서 인류학 등의 도움을 통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읽어내려는 연구를 하고 있다. 

임지현 = 지금 이야기는 북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보면, 뤼트케 교수가 예로 든 서구의 노동자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에 담배도 몰래 태우곤 하는 우리말로 ‘땡땡이’ 치는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의 이미지는 독재자에게 완전히 장악된 전체주의 사회인데, 일상을 보면 독재 체제에서 규율·명령에 따라 엄청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상과는 다른 현실의 노동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규제나 통제가 100% 실현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꿈이지만 그 꿈은 노동자들에 의해 늘 배반될 수밖에 없는 꿈이다. 

뤼트케 =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독일의 나치 시대에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나치 집권에 반대하고, 투쟁도 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나치의 집권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되거나 심지어 적극 협력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일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나치는 영악하게 여러 일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원래 무급휴가였던 메이데이(노동절)를 유급휴가로 바꿔줬다. 히틀러가 ‘기쁨을 통한 힘’이라고 부른 일종의 나치적 복지정책을 통해 광범위하게 실시되는데, 국민차(폴크스바겐) 보급 프로젝트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막 결혼한 사람들에겐 인센티브도 줬다. 

흔히 억압을 당해서 나치즘에 동원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일상의 사람들에겐 가정을 만들고 이루어나가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결국 반대한 사람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동조하게 됐다. 나치 식의 전쟁 동원 방식이 작동된 것이다. 많은 병사들에게 전쟁은 폭력이지만 동시에 점령 국가로 해외 여행을 가는 기회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아랫 사람이었던 많은 평범한 독일 사람들에게 현지인들을 하인부리듯 하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독일 사람들에겐 이같은 매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독재체제의 대중동원이 꼭 대중을 속여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임지현 = 박정희 독재 정권도 독일의 국민차 프로젝트와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퍼블릭카’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력으로는 무리였다. ‘마이카’는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가서 실현됐다. 경부고속도로 또한 ‘아우토반’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점을 늘 강조했다. 왕족이란 자부심이 강했던 이승만과는 가장 큰 차이였다. 빈농의 출신 배경을 볼모로 조국근대화, 국민차, 고속도로 같은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유도했다. 대중이 박정희를 지지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의 지지가 가진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그 바탕 위에서 그 체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대중독재’ 프로젝트 연구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데 알프의 일상사 방법론은 중요한 영감이 됐다. 

그리고 뤼트케 교수도 알겠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그의 당선과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담론의 층위들은 한국 사회에서 ‘기억과 기억하기’가 여전히 정치적으로도 살아있는 핫 이슈임을 입증해주었다. 다음 주의 국제 워크숍 주제인 ‘기억과 기억하기’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뤼트케 교수 생각은 어떤가.

뤼트케 = ‘기억의 정치’라는 것은 교과서의 기록이나 공식 행사의 연설처럼 한 사회나 국가가 공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쟁에서 누가 이기고 희생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차원의 축하행사, 기념일도 해당된다. ‘기억의 정치’에 관한 의례들은 기관화되었다. 개인들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쟁 직후 일반적으로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은 매우 제도화, 정치화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기억하기’는 개인들이 일상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보겠다. 1950년대다. 어머니가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은촛대를 없애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촛대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같은 집에 살던 유대인 일가가 1942년 강제수용소로 쫓겨날 때 두고 간 것이었다. 그것을 물려받은 어머니는 항상 죄의식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생전에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일상에서 ‘기억하기’란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유태인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은촛대를 가진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일 사회 일반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기억이 일상의 기억으로 바뀌는 변화는 1968 혁명이 계기였다. 청소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에게 홀로코스트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가 나치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믿지 않고, 부모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해 묻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까지는 히틀러와 나치 소수악당만 욕을 하는 상황이었다. 부모한테 물어보는 순간, 공식적인 기념의, 기억의 정치의 장으로부터 일상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 기억은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생존자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기억해내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학)’가 아니라 ‘기억하기’인 것이다. 

임지현 = 한국 사회에서도 박정희와 유신잔당, 전두환, 노태우 욕만 해왔다.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할 때, 한국사회를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고 본다. 10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하다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웃음)

뤼트케 = ‘기억하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민초들의 일상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두 개의 예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괴팅겐에서 나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 적이 있다. 맹반대한 보수적 여론이 주장하듯이 보통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은 병사를 위해 기념비를 만든다. 파시스트의 명령을 거부한 탈영병을 기념하는 것은, 공식적인 기억의 정치와는 다른, 밑에서부터의, 풀뿌리의 기억 방식이다. 또 반정부 시위 중에 경찰차에 깔려 죽은 학생을 위한 작은 조각상을 만든 적도 있다.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 죽은 이를 애도하곤 했다. 두 경우 모두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두 기분 나빠하며 반대한 사례들이다. 

임지현 =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도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이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에게 바친’ 우스꽝스러운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제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 한복판에 탈영한 국군 병사를 위한 기념비를 만든다면, 보수적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무명용사의 탑 같은 것은 자식이나 부인이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권력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탈영병 기념비는 탈영병을 사회적 추방자로 모는 게 아니라 권력의 횡포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던, 풀뿌리의 새 영웅으로 기억하는 방식이다. 

뤼트케 = 탈영병이나 경찰차에 깔려 죽은 학생을 위한 것 같은 풀뿌리 운동으로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례가 또 있다. ‘쉬톨페른쉬타이네’(Stolpernsteine)가 그것이다. 길가다 걸려서 넘어지는 돌부리라는 뜻인데, 예술가가 만든 5㎝ 크기의 조그만 네모상자 금속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금속상자를 나치에게 추방당한 유태인이 살던 집 앞의 인도에 설치하면서, 그 윗면에는 그곳에 살던 유태인 이름, 생년월일, 추방연도, 죽은 날짜까지 적어뒀다. 길을 가다 넘어져서 보면, 여기 이 집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게 하는 작은 기념비인 것이다. 거창하진 않지만 이렇게 지역과 일상사 차원에서 유태인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임지현 = 한국 경우에는 민주화 진영의 각종 기념사업회 같은 데 불편한 게 여전히 남아 있다. 박정희 기념비 프로젝트에 대항하려고 또 거창한 대체 프로젝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독재체제의 기념·기억의 정치의 형식·구조와 닮은 것이다. 우리는 지역 차원, 풀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우리는 작은 기념비가 없다. 한국의 4·3항쟁에 대한 기념도 일상사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억의 정치’ 차원에서 보면, 좌파나 우파가 4·3을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 실질적으로 제주도에 산 주민들은 일상에서 4·3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좌우 진영 논리를 갖고 어느 기억이 더 공식적인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싸움 보다는 일상의 기억하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척을 잃고 고통받은 보통 사람들의 기억 말이다. 또 좌파와 우파의 진영론을 넘어서 일상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예컨대 경찰 가족의 고통스러운 기억까지도 포함해서, 좌우 양쪽 진영의 공식 기억에서 배제됐던 사람들의 기억을 살려내야 한다. 역사가들은 사실이라는 칼날을 들고 증인들을 취조하는 형사의 방식이 아니라 공감의 방식으로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는 접근방식을 취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담지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걸 도와주고 지켜봐주는 그런 기록자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뤼트케 = 독일의 작은 기념비와 비슷한 걸 봤다. 일본대사관 부근에 산다.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 사람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담요도 덮어주고, 모자도 씌어준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오더라. 사람들이 작지만 실질적으로 위안부와 그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런 게 풀뿌리의 방식이라고 본다. 독일 이야기를 더 하자면, 동독과 서독의 ‘기억의 정치’가 달랐다. 동독은 자신들은 나치즘과 관련 없다며 서독의 자본주의 문제를 비판했다. 서독은 동독 인민들이 어떻게 스탈린주의 같은 끔찍한 독재체제를 용인하느냐고 비판했다. 구 동독쪽에서 네오나치가 많은 게 바로 풀뿌리의 기억하기를 하지 못한 것과 연관된 듯 하다. 

임지현 =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본다. 남북한도 기억의 구조가 비슷하다. 남한은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3대 세습을 견디냐고 비판하고, 북한은 친일파 문제는 자신들은 없다며 남한만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남북한의 ‘기억의 정치’에서도 독일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뤼트케 = 동독 사회를 일상사회학에서 보면 일종의 ‘틈새 사회’다. 정원사들의 모임이 동독에서 가장 큰 사회조직이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체제에 무조건 순응,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했다. 노동자들은 조그만 오두막에 30~40평 정도 땅을 가졌는데, 다들 거기로 도망간 사회였다. 공적인 영역에서 체제를 적극 지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자기만의 틈새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결국 일상사를 흑백으로만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게 아니라, 회색지대가 두텁게 존재했다는 말이다. 사회나 역사도 두터운 회색지대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 의식을 가져야 제대로 볼 수 있다. 희생자들 뿐만 아니라 독일의 비밀경찰 같은 이들도 ‘기억’을 갖고 있다. 

임지현 = 기억은 다중적이다. 현실사회주의 때 슈타지나 비밀경찰의 일상적 괴롭힘의 방식도 봐야할 것 같다. 그들은 고문이나 테러가 아니라 일상에서 사람들을 약올리는 식으로, 짜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밤에 똑똑 문을 두드리고 나서, ‘잘못 두드렸습니다’ 하는 식이었다. 이게 뭐냐면,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심해라’는 뜻이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밤마다 일상의 괴롭힘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도 박종철 고문사건 같은 것은 많이 이야기하는데, 군사독재 때 일상에서 어떤 괴롭힘, 지분거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안 한다.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 등은 생체권력의 지표이기도 하지만, 일상에 대한 독재의 테러이기도 했다. 

뤼트케 =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을 두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잘 감시할 것인가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한 프로페셔널 경찰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프로페셔널로 여겼고,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지런함과 나쁜 짓을 분리시킨 것이다. 

임지현 = 일상사의 다른 단면도 있다. 박정희가 만주국의 경험에서 차용한 것인 주민등록증이다. 우리안의 파시즘 문제를 제기할 때 불심 검문 폐지운동 하면서 주민등록증도 없애자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 범죄자, 불법체류노동자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필요하다며 폐지를 반대했다. 나쁜 사람들 때문에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매우 안전한 사회가 된다고들 여겼다. 삼청교육대는 깡패를 소탕하고, 범죄율을 줄이기 위해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 깡패들은 삼청교육대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을까? 일종의 트레이닝 캠프, 커넥션 캠프 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뤼트케 교수에게서 배우는 바는 어떤 문제든 하나씩 단절된 게 아니라 복잡계처럼 얽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일상사를 한다고 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트레벨리안 류의 잡동사니 역사와는 다르고, 사소함 속에 응결되어 있는 축적된 역사를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50030021&code=960100 경향일보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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