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츠지 히토나리의 책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냉정과 열정 사이 Blue'를 연달아 읽게 되었다. 남녀 작가가 주고받으며 쓴 책의 '남자' 입장만 주구장창 읽은 셈이다.
두 권 다 낯이 익다. 하지만 스물한두살 때, '현재'를 살아가며 아오이를 사랑하던 준세이와 서른 즈음이 되어 '과거'에 사로잡힌 준세이가 같을 수 없듯,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8년이란 세월의 계곡은 얼마나 깊고도 험한가.
하여튼 두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냉정과 열정 사이 blue'의 아류작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의뢰 때문에 쓴 작위적인(?) 작품이라 그런지, 소재가 고갈된 건지. 유사한 부분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거의 자기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1) 남녀가 각각 1인칭 시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 방식
동일한 주제로 시점을 달리해서 남/녀 작가가 소설을 내는 것은 '지금은' 흔해진 상황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출간 당시에는 이러한 방식이 실험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작품의 성공 이후에는 여러 작가게 의해 차용되어 흔해진 방법이다.
단순히 남/녀 작가가 연인 관계에 대입되어 다른 책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 내에서 두 주인공이 같은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시점만 달리해서 서술하는 방법(무라카미 하루키 - IQ84), 주제와 문제의식만 공유하되 서로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정이현, 알랭 드 보통 - 연인들)까지 해서, 점점 다양한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여튼 주고 받는 서술 방식이 처음엔 참 신선했는데 이제는 흐음.. 하는 느낌
2) 과거를 품고 살아가는 남자주인공
둘 다 20대 초반에 겪은 뜨거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랑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정하고 이별 후에도 지속적으로 마음을 키워 간다는 점도 동일하다. 답답하고 바보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랑도 있는 거니까.
3) 매력적이지만 온전히 사랑 할 수 없는 여자친구
주인공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날 의지도 없기에(오히려 지나간 사랑에 몰입하여 절대적 가치와 신화를 부여하는 과정을 겪고, 이로 인해 그 감정과 대상은 대체가능성 없는, 공략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필연적으로 현 여자친구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둘 다 매력적인 이성으로 묘사되면서도 과거를 뛰어넘기는 불충분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도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 여자친구는 ~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 는 이랬다' 는 독백이 이어진다.
그러한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비참해져가는 여자의 모습도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언어와 신체를 총동원하여 애원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여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한없이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나쁜 주인공.. 하지만 이런 나쁜 남자의 속을 들여다보면 찌질한 집착남이 보인다는 아이러니. 지고지순한 사랑은 '유일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관계는 거짓과 위선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관계의 파멸은 예고된 수순이라.
4) 모성애의 결핍, 무능력/부도덕한 아버지
주인공이 헤어날 수 없는 '과거'를 사는 것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지난 감정에 대한 회한과 감상은 짙어지게 되어 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은 부모의 부재 / 없느니만 못한 부모의 존재로 인하여 한층 더 고독 속에 휩싸이게 된다. 조연급 인물로 주인공이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 나오기는 하나, '부모'의 존재와 대비되어 오히려 주인공의 딱한 처지를 부각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5) 막연한 약속 또는 우연한 재회까지..
10년 뒤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요.
내가 너와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언젠가 너도 그 책읽고 내 맘을 알아주겠지.
막연하다. 우연함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성'을 쌓는 과정이라 보는게 맞지 않을까. 각자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
6) 주인공을 그리워하는 상대방과 어중간한 결말
두 작품 다 결말이 어중간하다. 매력적인 남자에게 청혼을 받은 베니, 새로운 남자친구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한 아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주인공과의 재회를 피하지 않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인공을 희망고문시킨다. 먼 두오모까지 발을 옮기거나, 생일선물을 주며 재회한 그들은 몸과 마음을 나누며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수년의 세월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대답은 회피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현실감각 있는 독자라면 열정이 냉정을 이기기 쉽지 않겠다, 는 결말 또한 예상할 수 있으르 것이다.
7) 시간적 거리와 '기억'의 힘
주인공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랑의 끈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은, '수년이 경과한 후'에도 약속 또는 생일을 잊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상대방의 '기억'에 있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거을 추정 가능하게 해준다. 그 세월을, 추억들을 잊지 않았으며, (형태와 강도는 변했을지망정) 나에 대한 호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나에게 그랬듯 너에게도 내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재회.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는 감정들의 향연에 재회 후 주인공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기쁘되 버거워한다.
+) 냉정과 열정사이 여주인공 이름은 '아오이=blue'. 사랑 후에 오는 것을 여주인공 이름은 '홍=베니=red'
아.. 너무 작위적인 대비 아닌지.
또 왜 '인수'는 여자입니까. 작가님 작명센스좀!
+) 배경이 되는 국가의 예술적 요소가 개입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보티첼리 등 미술이,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부각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보티첼리 등의 미술이,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부각된다.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지식은 나부터가 얕아서 이렇다 저렇다 평을 못내리겠지만, 자주 인용되는 윤동주의 시는 어딘가 어색해!!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해서 녹여냈다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끼워맞쳤다는 인상을 주는 어색한 인용이 몇군데 있다.
+) 이노가시라 공원, 키치죠지, 우메가오카, 오기쿠보, 미타카.. 이런 지명이 너무 나쯔까시이!!
JR 노란거 타고 덜컹거리면서 기차여행 떠나면 너무 좋겠다... 내년에 가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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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다소 기대 이하였고, '냉정과 열정 사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스물 여섯 지금 여기의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문구들을 추려 봅니다.
# 잊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지금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이 거리의 푸르고 투명한 하늘처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략) 아오이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들고, 실제로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기억의 심술이다. 여기가 마침 시간이 정지해 버린 거리여서 그런지, 나는 어딘지 모르게 과거에 흔들리는 나 자신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 아오이를 일상에서 쫓아 내지 못하는 한, 매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고양이같은 그녀에게 화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상대를 옭아매고 싶지 않으니까, 하고 얼버무린다.
결국 아오이가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난 아직 아오이를 가슴 속에서 내몰아버릴 정도의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나는 과거를 쫓아가도 좋은 건지, 또한 미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약속, 그 주술적인 올가미에 묶여 있는 내 자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가 기다리고 있다. 서른 살 생일, 5월 25일..
# 메미의 요구로 그녀를 품에 안았고, 마음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남자라는 동물은 이렇게 허망하다.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안을 수도 있기에. 그것은 반쯤은 동정에 의하나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메미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관계를 마칠 때 마다 후회하지만, 오늘이라는 날을 어떻게든 지내고 보자는 게으르고 자포자기적인 성격 탓에 나는 일순의 쾌락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사무적인 행위라는 것을 메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메미는 집요하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나에게 안긱는 것 외에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서로를 안는 것이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라도 한 것 처럼.
# 메미는 울먹이며 그러너 말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다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어두워졌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복원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복원시켜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찢어진 그림을 어떻게 복원시켜야 할까. 바니스를 칠해야 할까, 판화의 뒷면을 조사해야 할까, 아니면 벌레 구멍을 막아야 할까. 먼저 액자를 바꿔야 할까, 아니면 접착을 다시 해야 할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격심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올 뿐이었다.
# (전략) 이상하게도 오히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아오이와의 추억을 평생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자는 결의가 생기는 것이었다. 아오이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 며칠 전, 인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건 불행한 일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지만, 몇 번이라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 수 있다. 자신의 새로운 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기다리는 시간. 그것은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기다림의 저 앞에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은 8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 눈 앞에 꿈에도 잊지 못한 아오이의 검고 아름다운 눈이 있었다. 감정의 둑이 터지면서 한숨이 밀려 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비로소 지금이라는 현실을 보려 하고 있다. 눈 앞에 있는 아오이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눈앞의 아오이는 미래다. 그런 생각과 함께 행복과 불안이 내 몸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 아오이의 생각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이가 그 허망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경이로웠지만, 내가 8년이나 기다려 온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 또한 경이였다. 이런 기적이 일어났기에, 우리 두 사람은 보다 강렬한 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만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아오이의 눈이 아름답게 느껴지면 질수록, 내 마음은 갈 곳 몰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도대체 무어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안고 있는 것은 8년 전의 아오이였다. 아오이도 필시 8년 전의 나를 안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와 잔 것이다. 1초라도 빨리,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계곡을 메우고 싶었다. 임시로라도 다리 하나 놓고 싶었다. 그러나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험했다.
# 눈앞에 있는 아오이가 8년 전의 아오이와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데 고작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몸도 옛날과 다름없었지만, 거기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어딘가 구멍이 뚫리고 틈이 생긴 것 같았다. 바로 그것을, 복원사인 내가 찾아내어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를 신중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다.
# 약속만을 유일한 삶의 의미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과거만을 짊어지고 살아온 나 자신에게, 이제 와서 신은 무엇을 새로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 이 순간, 과거도 현재로 미래도 퇴색하고 현재만이 빛을 발한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일순간이며, 그것은 열정이 부딪쳐 일으키는 스파크 그 자체이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현재는 점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때렸다... 나는 과거를 되살리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를 울러펴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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