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 연인들

from 도서 2013. 4. 25. 19:24

- 애초에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뜬금없는 제안을 수락하는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을 하려 들고 있는지에 대해 화가 났다. 오늘 만나게 될 여자는 그 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다.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그보다 두 살 어린 미혼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수십만 명에 이를 터였다. 수십만의 여자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한 명이라니. 세상에. 그 단 한 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하다니! 아아, 어리석은 희망이여. 그는 자책했다.


-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않아도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어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는 인상이라는 것이 박민아를 아는 여러 벗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어색한 순간이면 먼저 웃어버리는 그녀의 버릇은 그러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인간관계에서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먼저 짓는 미소는 이를테면 먼저 쏘는 총알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으니 경계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제스처 속에는 상대를 안심시키고 시작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으며, 이는 상대가 안심의 차원을 넘어 방심하거나 방만해졌을 때 내 쪽에서 뒤통수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다. 선제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잠언은 전쟁터에서만 쓸모 있는 게 아니었다. 

 

- 언젠가 홀로여야 한다면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무의식이 말하고 있었다. 


- 두 개의 다른 포물선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적에 대하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었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 연애의 종착역이 결혼이어야 할까? 통념상으로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비틀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연애'의 종착역이 결혼인가, 라고 한다면 말이다.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준호에게 연애란 비현실적인 어떤 것, 구차한 현실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은 그녀가 그에게 '떠난다'는 표현을 입 밖에 내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한 덩이 밀가루 반죽처럼 막연하던 상상이, 스스로에게도 느닷없던 충동적인 발화를 통해 세상에 던져진 뒤 빠르게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가는 못브을 민아는 얼마간의 두려움과 얼마간의 안도감으로 지켜봤다. 다행이다. 민아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말이 먼저 튀어나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해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 ..(중략) 자신이 더 늦은 시간을 택했다는 것을 그 순간 준호는 민감하게 의식했다. 그들은 각자 저녁 여덟시에 대해 생각했다. 여덟시, 자정까지 네 시간 남은 시각. 저녁이라기엔 늦고 밤이라기엔 이르다. 경탄 속에서 서로의 몸을 껴안고 보낸 여덟시들이 있었다. 창밖이 얼마나 깊고 푸른 어둠 속에 잠겨가는지 따위는 염두에 둘 겨를이 없던 그때. 몰입만이 전부였던 때. 이제는 아득하기만 했다.


- 그들은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에 소속되지 않은 관계였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연인 관계가 된다는 건 상대방과 일부일처를 모방한 배타적 관계를 맺겠다는 무언의 약속에 동의한 결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다. 서로의 사랑을 보증금처럼 걸었지만, 어떤 공식 서류에도 자필서명하지 않았고 어떤 사유재산도 공유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결국 타인에 불과했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인이었다. 개인적 책임감과 상호신뢰 따위의 보험신탁회사의 경영이념 비슷한 소리를 들먹이는 것 말고는 상대의 배신을 추궁할 어떤 권리도 없었다.


-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 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한 때 뜨거웠던 열정이 느린 속도로 사그라져 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고장난 조종간을 끝까지 지킨 기장과 부기장처럼 서로에게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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