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닌 어딘가


김선재


문을 열면, 

구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처럼 애매한 단어가 좋아

당신이 사슴이라고 읽으면 재주를 넘지 않아도 사슴으로 변하고 

당신이 슬프다고 말하면 동공이 사라진 짐승의 몸을 어루만지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아무래도 나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코트 자락에 남은 옛날의 어느 저녁이 

사라지지 않는 저녁이 

기억나지 않는다

명사를 잊어가는 노인의 싸늘한 손처럼 

오직 떨림만 

흔들리는 온도만


단수와 만난 단수는 복수가 된다

단수와 헤어진 단수는 여전히 단수다

그러니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

구름과 어제가 지나갔을 뿐


구름과 함께 걷는 길, 나는 두 몸 같은, 세 몸 같은 꿈에 잠긴다

코끼리의 외로운 보폭을 가늠하는 꿈

낮잠에서 깨어난 어른이 소년처럼 우는 꿈

또는 순례자의 얕은 꿈을 걱정한다고 해도 괜찮겠지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는 말도 괜찮겠지


괜찮다는 말, 나를 끌고 가는 구름에 대한 해석. 

비로소 잃어버린 명사들과 제대로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잠에서 깨면 모호한 당신이라는 말,

여전히 머리맡을 서성거린다


문을 열면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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