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뿐만 아니라 루틴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https://medium.com/%EC%95%8C%ED%8A%B8-alt/haruki-murakamis-routine-celebrity-routine-3-74d80c5a07c)
나도 짧지는 않은 기간 동안 직업인으로 살며 새벽 패턴을 (정립까지는 하지 못했고) 선호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루틴과 비슷하여 + 자유롭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드디어 놀라운 자연치유력의 효과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그 준비 단계로 고른 책.
"이 책은 무라카미 씨가 어떻게 소설을 써 왔는지를 이야기한 책이며, 이는 거의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야기한 것과 같다. 그래서, (중략)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즉, 거의 모든 사람에게) 종합적인 힌트와 격려를 주는 것이다(시바타 모토유키)"라는 소개 글과 같이, 참고할 부분이 많았다.
특히 (i) 직업인으로서 "계속성" "지속가능성"에 대한 서술에 큰 공감이 갔고, (ii) 논문 작성이라는 지상 과제에 직면한 나로서는, (호흡의 측면에서 에세이 등 잡문 = 메일 커버 기타 단순 업무, 단편 소설 = 의견서, 장편 소설 = 논문이라는 공식을 세운다면) 하루키가 장편 소설을 쓸 때의 자세나 마음가짐, 루틴이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초고를 다양한 관점에서 반복하여 수정하는 습관은 CJ가 저년차 때 알려줬던 스킬과 비슷한데, 자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 간의 유사성을 발견한 듯 하여 혼자 흥미로왔음. (iii) 마감(기한)에 관한 부분 너무 뜨끔했고,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반드시 보완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함.
물론 이 에세이에도 하루키 특유의 자기반복 + 다소 장황한 비유와 서사는 여전하고, (본인이 자인하듯, 소설이 본업이고 에세이는 부업 같은 것이라 그런지) 정제되지 않아 거슬리는 부분도 있으나, 건질 문구들만 선별하여 정리. 일문본을 읽고 본인용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번역이 국문 출판본과 다를 수 있음. 상당 부분 의역도 있고 일부는 앞뒤를 바꾸기도 함.
- 하나의 소설을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뛰어난 소설 하나를 쓰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하여 쓰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 "창조성이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확고한 정체성,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고, 그것이 재능에 반영, 융화되어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창성이란 창조하는 것, 기존의 견해를 부수고 상상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뻗어, 마음 속에서 완전한 세계를 몇 번이고 만들어 내고, 그러면서도 항상 그것을 비판적인 내적 시선으로 감시하는 것을 의미한다."(올리버 색스)
- 한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여겨졌던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이, 어느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감명이나 자극, 치유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그림이 독창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이 그 독창성에 동화되고, 그것을 하나의 참조(reference)로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츠메 소세키나 헤밍웨이의 문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과거에 독창적이었던 것을 현 시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같은 시대에 존재하는 독창적인 표현 형태에 감응하고, 이를 현재진행형으로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면 이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불쾌한, 부자연스러운, 비상식적인 - 경우에 따라 반사회적인 -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략) 독창성이란 그것이 실제 살아 움직일 때에는 그 형상을 가늠하기 어렵다. 사견으로는, 어떤 표현하는 자를 "독창적"이라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아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i) 다른 자들과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사운드, 문체, 색채 등)을 가지고 있고, 보거나 들으면 아마 그 사람의 표현일 것이라 (대략) 바로 알 수 있을 것.
(ii) 그 스타일을 자신의 힘으로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자발적, 내재적인 자기혁신력을 가질 것.
(iii) 독자적인 스타일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표준화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 또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풍부한 인용의 근거가 될 것.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듯, 독창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시간의 경과"가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진 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세간의 이목을 끌더라도,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질려 버린다면, 이를 "독창적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원 히트 원더"로 끝나 버리고 만다.
- "원천(源泉)에 닿기 위해서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쓰레기뿐이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 당신이 무언가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면,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는 자신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그러한 모습을 머리 속에서 시각화해보는 것이 좋다.
- 만약 내가 쓰는 소설에 독창성이라 불릴 만 한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매우 단순히, 특별한 이유도 없이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의 마음을 비춘 소설이 쓰고 싶었다 - 단지 그것 뿐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즐거웠고, 자신이 자유롭다는 자연스러운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중략) 여러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부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 한다. 독창성이란,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전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구, 충동이 가져오는 결과인 것이다.
- 나는 Writer's Block이라 불리는 현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싫을 때, 또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때에는 전혀 쓰지 않기 때문이다.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자, 이제 쓰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중략)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다 보면, "슬슬 소설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눈 녹은 물이 댐에 고여 가듯,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내면에 축적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참을 수 없어져서(가장 좋은 상황)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 장편소설을 쓴다는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기본적인 순서나 규칙은 큰 틀에서 변하지 않고, 나에게는 통상적인 영업행위 = Business as ususal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어떤 정해진 패턴에 자신을 몰아 넣고, 생활과 업무의 사이클을 확정함으로서, 비로소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해 진다는 측면이 있다.
장편소설을 쓸 때에는, 우선 책상 위의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돈한다. 소설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작성하지 않는다는 태세를 취한다. 하루에 4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원고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더 쓰고 싶더라도 10장 정도에서 멈추고, 잘 풀리지 않는 날에도 10장은 어떻게든 채운다. 장기간 일을 할 때에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잘 써지는 날에는 엄청난 기세로 잔뜩 써버리고, 써지지 않는 날에는 쉬어 버린다면, 규칙성은 생기지 않는다. 출근 카드를 찍듯, 하루에 10장을 채운다.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은 "나는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쓴다(Write a little every day, without hope, without despair)"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루 10장의 원고를 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데우고, 4~5시간 책상에 향한다. 하루 10장 원고를 쓰면 한 달에 300장을 쓸 수 있다.
장편소설은 초고를 마친 후에도 다른 승부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가 시간을 들일 만한 보람이 있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초고를 마치면, 조금 시간을 두고(1주일 정도) 첫번째 수정본을 쓰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 첫 부분부터 전부 고치기 시작한다. 이 때에는 큰 틀에서, 전체적으로 손을 본다. 모순되는 곳,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발견되면 하나 하나 조정하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정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수정 작업에 1~2개월이 소요된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면, 다시 1주 정도 두고 두번째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세부적인 부분에 시선을 두고, 정성스레 고쳐 나간다. 풍경의 묘사를 다듬거나, 대화의 흐름을 조정한다. 논리의 전개에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쉽게 풀고, 말의 흐름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도록 한다. 대수술은 아니지만, 작은 수술을 반복한다.
다시 조금 쉬었다가 다음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번엔 수술이라기 보다는 미세 조정에 가까운 작업이다. 어느 부분의 나사를 조금 더 조여야 할지, 아니면 풀어야 할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해 진다. 전체와 부분의 밸런스를 조정한다.
이때 쯤에 한번 긴 휴식을 취한다. 건설현장에서 "양생"이라는 단계가 있는데, 제품이나 부품을 재우는 것을 의미한다. 방치하는 행위를 통해 공기를 통하게 하고, 내부를 단단히 굳게 하는 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 다시 세부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수정하기 시작한다. 충분히 재워둔 작품은, 전과는 제법 다른 인상을 풍긴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결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충분히 깊이 있는 이야기인지(奥行きのあるなし) 여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양생했듯 내 머리도 양생하였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제3자의 의견이다. 나는 어느 정도 작품으로서 형태가 잡히면 우선 아내에게 원고를 맡긴다. 그녀의 비평에는 "과연 그렇군""그럴지도 모르겠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생각이 역시 맞아"라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제3자" 도입 단계에서 내가 지키는 하나의 룰이 있다. 그것은 "지적을 받은 부분이라면, 어느 경우이든 다시 쓴다"는 것이다. 비판에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쓴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방의 조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방향성은 어찌 되었든, 자세를 바꾸어 그 부분을 다시 쓰고, 다시 읽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부분이 전보다 나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읽은 사람이 어느 부분에 무언가를 지적하였다면, 지적의 방향은 차치하더라도, 그 부분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막혀 있는 경우가 많고, 내 일은 그 막힘을 정돈하는 것이다. 설령 "이건 완벽한데? 고칠 필요 없는데?"라고 생각하더라도, 묵묵히 책상 앞에 앉아, 어찌 되었든 다시 쓴다. 왜냐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쓰였다"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자신의 작품이 출판된 후 냉엄한 - 생각지도 못한 수준으로 엄중한 -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다. 왜냐면 나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 만들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확실한 느낌이 있다면, 두려워할 것은 없다. 나머지는 시간에게 맡기면 된다. 시간을 소중히, 신중히,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중요하고, 시간을 나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레이몬드 커버(Raymond Clevie Carver)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있었다면 더 잘 쓸수 있었을텐데"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나는 정말 아연실색했다. 그의 소설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런 소설 따위 왜 쓰는 것인가?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열심히 해냈다는 성취감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그 지인에게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훨씬 간단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쥐어짜낸 것, 있는 힘껏 힘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쓸 것. 변명을 하거나, 자기정당화를 하지 말 것. 불만도 핑계도 대지 말 것."
작가들 중에는 "마감 기한이 닥치지 않으면 글을 못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 전투적이라고 해야 할까, 결기 있는 스타일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시간에 쫓겨 우당탕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젊을 때에는 어찌어찌 잘 될수도 있겠지만, 한 때 그러한 방식으로 잘 해내더라도, 긴 호흡에서 보면 시간이 흘러가며 점점 형편없어지는 인상이 있다(집의 욕조에서 데운 물과, 뜨거운 온천에서 솟아나는 깊은 물의 차이 같은 것이다).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일정을 조정해 가야 한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더 잘 썼을텐데, 라는 것은, 그 작품을 쓴 시점에 나는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 - 단지 그 뿐이다. 잃어버린 기회는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 후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고유의 체계를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 냈고, 정성을 들여 주의깊게 정비하여, 소중히 유지해 왔다. 이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어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런 일반적인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보람차다.
독자가 나의 작품을 통해 "온천물의 깊은 따뜻함"과 같은 것을 피부의 감각으로 조금이라도 느껴 준다면, 이는 정말 기쁜 일이다. 나 스스로도 그러한 실감을 추구하며 여러 책과 음악을 섭렵해 왔기에. 자신의 "실감"을 믿자.
- 책상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 3일이라면 소설가가 될 수 없다. 3일이면 단편소설 한편 정도는 쓸 수 있겠지만, 다음 소설을 쓰는 사이클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창작활동을 하려면 계속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지속력이 필요한데, 지속력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초체력을 키우고, 물리적인 힘을 얻고, 자신의 몸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전업 작가가 된 후 매일 1시간 정도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1년에 한번은 풀코스 마라톤을 뛴다. 이러한 생활을 거듭함으로서 작가로서의 능력은 조금씩 높아지고, 창조력은 보다 단단해져 안정화되었다고 느낀다. 매일 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 스스로도 잘 알수 없지만, 근육 증가와 체중 조절을 넘는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다. 달린다는 행위가 "내가 이번 생에서 해야 하는 것"의 내용을 구체적이면서도 간결하게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작업과 관련하여, 나는 매일 5시간 씩 책상 앞에서 "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마음의 강함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닌, 후천적으로 얻은 것이다. 나는 자신을 의식적으로 훈련시킴으로서 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갖춰야 하는 소양으로 "정신적인 강인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 마주하더라도, 소설을 계속 쓰겠다는 강한 의지를 장기간 유지하려면, 내가 영위하고 있는 삶의 질적인 측면이 문제된다. 우선 "온전히(十全に) 살아갈 것". 온전히 산다는 것은,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확립시키고, 이를 한걸음 씩 착실하게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도망칠 곳이 부족한 사회에서, 개인과 시스템이 조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이 자유롭게 손발을 뻗고, 천천히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제도, 위계질서, 효율과 같은 것과 동떨어진 장소이다. 나는 이를 "개인의 회복실"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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