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를 지배한 아이콘 중 하나는 홍상수였다. 내가 느끼던 막연한 불안, 우울, 내지는 선한 가치에 대한 반역적 시선(진정한 사랑이란?)을 이토록 잘 구현한 감독이 또 어디 있던가? 그가 스스로 말하듯 그의 영화는 인생의 한 사이클을 산 사람, 20대 후반 이상을 타겟으로 하는데,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인생(특히 남녀관계/감정)의 어려움을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이해하고, 나름대로 풀어냈다(교과서를 잘못 고름).

하지만 30대가 되고 조금씩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의 영화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안정적인 생활,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할수록 그의 영화나 메시지가 내포하는 불안정성(내지 그 미화/정당화)을 견디기 어려워진 것이다. 설령 그의 영화나 메시지에 공감이 된다 하여도 그건 주로 내가 지우고 싶거나 부끄러워하는 스스로의 단면에 닿아 있었기에, 어떻게든 제도권 안에서 몸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다가 고 이선균 씨의 부고를 친구의 입을 통해 嵐電 정류장에서 우연히 전해듣고, 문득 다시 보고 싶어져서 이 영화를 꺼냈다. 30대 후반이 되어, 반 발짝 떨어져서 보니, 내가 갈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고뇌했던 감정, 관계의 실체가 조금은 더 선명히 보이는 것 같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이선균이나 홍상수의 선택을 할 수 없는 – 할 용기가 없는 - 사람이므로 여전히 홍상수의 영화와 거리를 두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종종 생각날 때면, 권태에 대한 정당화 기제가 필요할 때면, 아니면 불안한 예감에 대한 선험적인 시각화를 원할 때면, 가끔 찾아볼 것 같다(가급적 위로와 공감을 얻어서는 안될 것이다).

영화에 대한 평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언어를 구사하는 한겨례 기사로 대체.

https://www.hani.co.kr/arti/culture/movie/617895.html

인간이라는 딱하고 예쁜 존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올해의 영화 1위에 올랐다. 꿈과 현실이 동등하고 정연한 배치로 흘러가며 만드는 리듬과 정서가 아름답다. 애처롭고도 씩씩한 젊은 여자가 삶에서 그리워하는 것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홍상수가 냉소주의자가 아니라 인간을 딱하고 예쁜 존재로 바라보는 작가라는 사실을 어떤 전작보다 분명히 깨닫게 해준다.(김혜리)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로 선정한 지지자들을 대표할 만한 평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애상의 감정이 유독 깊은 영화로 손꼽힌다. 젊고 씩씩하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소망도 많은, 해원이라는 젊은 여성 캐릭터가 겪어내는 그 감정의 모험극이 진한 여운을 전한다는 의견도 많다.
 
영화 속 꿈과 현실을 동일 질감으로 오가며 만들어낸 그 새로운 미학적 성취에 대한 찬사는 더 말할 것이 없다. 해원을 통해 드러내는 홍상수의 기하학적 청사진. 시공간을 뛰어넘는 통쾌함과 청량한 감상이 주저없이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게 만든다.(이지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는 시간을 견디고 반복하고 다시 감각하기 위해 애쓰고, 그런 자신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동안 홀로 외롭고 슬프고 무서웠으나, 적어도 죽음에 지지 않았다. 한없이 서글프지만 결국은 죽음에 지지 않는 영화. 홍상수의 열네 번째 영화는 그렇게 또 한번, 또 다르게 생을 깨어나게 한다 (남다은) 등의 평들이 제출된 바 있다.
 
그러니 그 말들을 따르자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꿈과 현실을 아름답게 잇고, 죽음과 용기 있게 대면하고, 생을 새롭게 두들기는, 불가사의한 영화다. 그로써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올해의 영화 1위가 된 것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주인공 성준과 이선균 씨를 대조하며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Movie Quotes:

*

진주(김자옥): 공부는 잘 하고 있지? 학교에서

해원(정은채): 엄마, 용기를 학교에서 배우는 줄 알아요? 다 똑같애. 사는거야 그냥.

진주: 그렇구나

 *

해원: 난 캐나다가 엄마한테 좋았으면 좋겠어요.

진주: 그전에 한 번 가본 적 있어. 나 거기 가서 내 마음대로 하고 살거야. 맨발로 길거리도 막 걸어다니고, 길거리에서 막 춤도 춰보고. 거기서는 다 할 수 있어. 정말이야.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 볼거야

해원: 엄마 맘대로,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아요.

진주: 너도 그래. 사는 건 죽어가는 거야. 하루하루 조금씩 죽음을 향해서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나처럼 살지 말고.

해원: 그렇게 살고 있어요.

*

해원: 오랜만에 비맞고 다니니까 좋네요. 오랜만이에요 진짜 비맞는거.

성준(이선균): 어 그래. 비맞으면 갑자기 딴 세계 온거 같지. 그지

(중략)

성준: 옛날에 내가 좀 미쳤었거든. 근데 오늘은 니가 좀 그런거 같다 야

해원: 선생님 내가 미친 것 같아요?

성준: 어? 아냐 아냐. 너 너무 예뻐. 너무 예쁘네 진짜.

해원: 나 선생님 보니까 저도 좋아요

성준: 너 왜 이렇게 예쁘니

해원: 왜 그래요 뻔뻔하게

성준: 뭐뭐 내가 뭐

해원: 정말 미쳐본 적 있어요?

성준: 어. 그런 것 같은데

해원: 선생님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성준: 뭐가 좋아 그게

(해원 문화재 파괴)

성준: 야 여기 들어가면 안될 것 같은데

(중략)

해원: 오늘만 같이 있어 줘요. 내가 힘이 좀 들어서 그래요.

성준: 알아.

해원: 술 한잔 하러 갈까요?

성준: 술 좋지.

해원: 술 마시고 싶죠?

성준: 어. 다 하고 싶어. 너랑은 다 하고 싶어.

해원: 허. 웃겨. 술만 해요 술만.

성준: 예쁜 새끼가 진짜. 사람 미치게 하려고 진짜

해원: 쳏 웃겨..

(위엄있는 동상 등장)

해원: (동창들에게) 내가! 오늘 엄마가 떠났어 캐나다로 가셨거든. 그래서 많이 슬펐어 그래서 내가 감독님 부른거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그게 진실이라고. 믿든 안믿던지. 암튼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

해원: 아빠가 나 어렸을 때 7년을 외국에서 일했거든요.

성준: 그래서 니가 다른 애들하고 좀 다른 것 같애.

해원: 뭐가 달라요?

성준: 아 그니까.. 너도 살라고 머리 쓰거든. 쓰는데. 좀 덜 머리 굴리는 것 같애.

해원: 나 악마에요.

성준: 악마야?

해원: 네. 악마에요.

성준: 니가 뭐가 악마야.

해원: 고마운데 선생님이 좋게 보는거에요.

(중략)

해원: 왜 그렇게 슬퍼 보여요?

성준: 옛날 사람들. 여기 성벽 쌓아올리고. 여기서 먹고 자고 했을 거 아냐. 하이고, 이게 다 뭔 소용이 있다고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참. 아무도 이제 기억도 못하잖아. 아무 것도 없는데.

해원: 여기 돌들 남았잖아요.

성준: 그래 돌은 남았지. 이게 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쌓은 거잖아.

해원: 하나씩 하나씩 어떻게 쌓았을까 이 산 위에까지.

성준: 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거야.

해원: 나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성준: 그래. 아니다, 그래도 세 개는 남겠다. 내 새끼하고, 내 영화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기억.

해원: 많이 남기네요.

성준: 그게 많아? 아냐 너도 똑같이 남길거야. 사람들이 널 기억할거고. 그러고 나중에 너가 결혼하면 애도 낳을 거고.

해원: 안남길거라니까요. 선생님 혼자 많이 남기세요.

성준: 알았다. 그래 그럼.

해원: 가요.

 *

성준: 이거 뭔지 알아?

해원: 뭐에요?

성준: 사직서야.

해원: 그만 둘라고요?

성준: 그만 둘까?

해원: 농담이에요? 사직서네..

성준: 아침에 써봤어 그냥.  그냥 써봤어.

해원: 이거 낼거에요?

성준: 그냥 써봤어. 새벽에 일어나가지고 그냥 써봤는데, 웃긴 게 눈물이 좀 나는 것 있지 진짜 빙신같이. 식구들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한거야.  돈도 못버는 놈이 앞으로 뭐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찢어버릴까?

해원: 잘 생각해서 하세요. 생활은 해야 되잖아요. 애기도 있고

성준: 알아. 그냥 최악을 연습해 본거야 마음으로.

해원: 선생님 잘못한 것 없어요.

성준: 널 좋아했잖아.

해원: 좋아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성준: 내가 미쳤나?

해원: 먹을 걸 싸올 걸 그랬나봐요.

(중략)

성준: 우리 잘하자.  그래서 오래오래 보자.

해원: 그러고 싶어요.

성준: 우리만 잘하면 돼.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 들키지만 않으면 돼. 전에 있던 일은 아니라고 끝까지 우기면 되는거야. 자기들은 증거 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

해원: 선생님.

성준: 어?

해원: 비밀은 없어요.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모르세요? 비밀 없어요. 결국 다 알아요.

성준: 그럼 어떡하니?

해원: 다 죽으면 돼요.

성준: 하하하! 아이 시끼 말하는거 봐 쪼끄만게. 넌 어쩜 이렇게 예쁘니?

해원: 선생님도 이뻐요.

성준: 사랑해.

해원: 이상하다, 그 소리 들으니까.

성준: 사랑해 정말

해원: 나도요.

해원(독백): 거기서 그만 갈 걸 그랬다.

*

성준: 이런 씨발 좆 같은!

해원: 알았어요 욕하지 마요. 욕하면 무서워.

성준: 뭐 씨발! 좆같애가지고 진짜.

해원: 무섭다 그랬죠!

성준: 뭐 욕이 어때서! 니가 한게 얼마나 더러운 줄 몰라?

해원: 뭘 더럽다는 거에요?

성준: 진짜 너가 한게 뭔지 몰라?

해원: 몰라요!

성준: 뭐?

해원: 당신 맘이 더러운 거겠지.

*

도서관에서 잠든 해원이 보던 책 / 국문 번역: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문학동네, 2012)

*

정원(김의성): 사세요. 저도 아까 그냥 물어봤는데 주고 싶은 만큼만 주시면 된대요 이거.

해원: 그래요? 그런데 그럼 제가 너무 드러나잖아요.

해원: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원: 해원씨가 좀 비슷한 것 같은데요?

해원: 네? 농담하시는 거에요? 뭘 아신다고요 저에 대해서

정원: 꼭 오래 봐야지 보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겉으로 다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해원: 뭐가 보이시는데요?

정원: 해원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고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안으로는 제일 용감한 사람인 것 같아요. 뭔가 힘이 너무 강해서 계속해서 부닥치면서 되게 아프고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계속 부닥칠 것 같아요.

해원: 그래요?

정원: 그래야지 자기가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계속 부닥치는거죠. 알고 싶은거죠 자기가 누군지. 그런데 그 부닥침의 강도나 지속이 대단할 것 같아요. 그건 뭐랄까 절대적인 진실 같은 것을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체험하고 싶은거 그런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보고 있으면.

해원: 그런 사람이 좋으세요?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정원: 아뇨.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있는게 필요해요. 뭔가 내가 망가뜨릴 수 없는 강한 개성 같은 그런게 제 옆에 있는게 저한테는 필요해요.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 건강한게 행복한 거잖아요. 네. 저한테 정말 그게 필요한 것 같아요.

해원: 아늑하네요 이집.

 *

중식(유준상): 깃발 참 멋지네. 어. 너무 단순한데? 너무 멋진 것 같애. 야 깃발은 참 정말 멋진 발명품이야 그지?

연주(예지원): 그것 때문에 바람이 보이잖아요 눈에.

 *

성준: 나, 더 이상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할 것 같애. 집에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못견디겠어. 학교 애들도 눈 못 마주치겠고. 너 정말 나랑.. 나 사랑하니? 너 너무 사랑하거든? 우리 어디로 가버릴까? 아무도 없는 데로?

해원: 어디로 가요 우리가 어디로..

성준: 강원도 같은 데.. 거기 내가 아는 신부가 있거든

해원: 선생님 잘못이에요

성준: 뭐?

해원: 우리 맨 처음 자고 나서 그게 끝이라 그랬잖아요. 그때 얼마나 좋았어요. 근데 선생님이 다시 전화했잖아요. 그때 전화하지 말았어야 해요

성준: 그래 내가 잘못한거고.

해원: 네 선생님이 잘못하셨어요. 원하는거 다 어떻게 하고 살아요. 왜 왜 다하려고 하세요.

성준: 다하려고 한거 아니야. 너 사랑한 것 밖에 없어.

해원: 사랑한게 아니라 내 생각을 안한 거겠죠.

성준: 꼭 그렇게 얘기해야 되냐?

해원: 너무 힘이 들어요. 너무 힘들면 아무도 못참아요. 아무도 못참아요. 선생님은 안힘드세요?

성준: 뭐하자는 거니 우리 지금

해원: 헤어져요. 헤어질 것도 없겠지만. 선생님 하나도 포기 안하려고 하시잖아요. 저도 잘 살고 그냥 그럴래요.

성준: 그래. 잘 살아라. 미안. 내가 인사하고 갈게.

해원(독백):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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