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5. 광화문 시네큐브
지금이 자네의 화양연화야
친해진 고객이 있다. 66년생 아저씨다. 다른 일로 서대문에 왔다길래 순대국 한사발 하고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나 빨면서 지나간 업무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친해지면 잘해주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다. 1월 1일에 급하게 처리해 주었던 업무 이야기를 하다가, 힘들진 않냐고 묻기에 으레 그렇듯 너스레를 떨면서 넘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저씨 눈망울이 묘하게 그렁그렁해지면서 "혹시 화양연화라는 단어를 아세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같은 시절을 화양연화라고 하지요. 저는 이제 일하고 싶어도 마음껏 일하지도 못해요. 내가 만할때는 일에 미쳐 살았지. 자정까지 일해도 힘든 줄을 몰랐어. 그땐 일이 재미있었거든. 돌이켜 보니까 그때가 화양연화였나보다 싶더라고. 힘들어도 찾는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지금이 화양연화니까 재미있게 해요. 내나이 되면 하고 싶어도 못해. ㅎㅎ"
문장으로 옮겨놓고 보니 흔한 586 세대의 꼰대 발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울컥했던 것은 우선 66년생 건설사 출신 아저씨와 사뭇 대조적으로 "화양연화"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의 산뜻함, 의외성, 그리고 화자의 진정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지금 프로젝트 끝나고 고정된 직업이 없으신 상태). 은퇴 후에 이것저것 해보려고 돌아다니시는 아버지 모습도 겹쳤다. 맞아 저 사람은 정말 내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 젊고 건강한 지금이 내 전성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문득 영화 "화양연화"가 재개봉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20대 때 처음 봤을때는 보다가 졸았는데, "20대때 봤을 때는 그냥 괜찮은 영화, 30대때 다시 봤을 때는 아련함과 슬픔으로 눈물이 나는 영화, 40에 이르러 또 다시 봤을 때는 내 인생의 인연들을 반추하게 만들고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추억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평을 보고 서른이 되면 다시 봐야지 - 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렸다. 같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도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산전수전 겪고 다시 보니 최애 영화가 되었듯, 화양연화 또한 그렇지 않을까 라는 기대와 함께. 도대체 화양연화란 언제고, 무엇일까.
사랑의 완성은 때로는 이별이다
당연히 푸른 청춘의 어느 예쁜 사랑을 그릴 줄 알았는데, 남주의 화양연화는 첫사랑도 결혼 상대도 아닌 불륜 상대였다. 서로의 배우자에게 배신당하고, 그 상처를 공감대로 만난 둘의 인연은 참 조심스럽다. 서로가 신경 쓰이고 호감은 가지만 "우린 그들과 달라야 하기에" 내민 손을 뿌리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 가운데 서로가 위치하는 공간(남자의 방, 호텔 등), 양조위의 포마드와 장만옥의 치파오로 상징되는 남/여성성이 주는 성적 긴장감이 상당하고, 침대와 소파만큼의 거리가 오히려 마음을 조인다.
그렇게 엇갈리고 스치고, 마음을 내어줬다가 거뒀다가, 결국 항상 풀세팅 상태이면서도 모럴은 흐트러지지 않는 장만옥이 이내 양조위에게 엉엉 안겨 울때 참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게 데이고 사람 때문에 아프고 힘든데, 다시금 사람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했다.
"티켓이 한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소?" "티켓이 한장 더 있다면 저를 데려갈 건가요?". 진심이지만 정답이 아닌 말들. 서로 두 눈을 바라보고 했으면 더 없이 로맨틱한 말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며 하는 독백이 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았을 때 온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별을 택하는 두 사람의 마음에는 너무나 공감이 된다. 결혼을 통해 사랑에게 배신당한 두 사람이, 오히려 이별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은 모순적이기에 아름답다.
화양연화를 최대한 즐기는 방법
작년 말 올해 초는 많이 힘들었다. 일은 많았고 인연은 어그러졌으며 나는 시종일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데 그렇게 일에 파묻혀 있는 순간마저도 사실은 화양연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청춘은 서른에 끝났다며 미화된 20대를 그리워하지만 과연 그때라고 행복했을까. 오히려 현재는 초라했고 미래는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꿨던 시절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잖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그러고 보니 30대는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몇 안되는 세월이다). 지금이 나름의 화양연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다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돌이켜보면 한 순간도 쉬운 시절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내 장점은 남들이 보기에 어려운 환경이어도 그 나름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충분히 향수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행복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일이든 사람이든) 결핍은 빨리 메워야 하고, 거리는 빨리 좁혀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졌다. 뒤쳐지기 전에 남들만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자력으로 메울 수 있는 결핍은 빨리 메우면 좋겠지만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도 무수히 많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그러지는 일도 있고, 내가 베푼 선의가 오히려 안좋은 결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지, 채우지 못한 나를 무작정 채찍질하거나 채워주지 않은 상대방을 탓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결핍 내지 공백을 이용하면 재미있는 일도 많을 수 있다. 소공녀의 미소처럼 단골 바를 만들거나, 12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면 스스로에게 위스키 한잔을 선물하고 꿀잠을 잔다거나(회사에 라산타라도 한병 들여놓을까...다 술얘기네...)... 상수를 견뎌내고 변수를 즐길 것, 내가 이뤄왔고 이루고 있는 일상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 돌이켜 보면 오늘을 그리워할 미래에 대한 예의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것.
기억에 남는 대사들
"낮에 사무실엔 왜 전화했죠?"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제 남편도 늘 그렇게 말했죠.
오늘은 왜 전화 안 했어요?"
"귀찮아할까 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요."
"우리야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절대 잘못돼선 안 돼요."
"내 말에 솔직히 대답해요. 당신 애인 있죠?"
"미쳤어? 누가 그래?"
"그건 알 것 없고, 있어요, 없어요?"
"없어"
"거짓말 할 거예요? 날 봐요, 나 좀 봐요. 정말 애인 같은 것 없어요?"
"있어."
(오열)
"그렇게 반응하면 안 되죠. 솔직히 그걸 인정했을 땐 받아들여야죠."
"난 자신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한 번 더 해봐요."
"솔직하게 대답해 봐요. 당신한테 애인 있죠?"
"미쳤어? 누가 그딴 소릴 해?"
"그건 알 것 없고... 있어요, 없어요?"
"없어"
"거짓말 말고... 솔직히 말해봐요. 정말 애인 없어요?"
"있어"
(오열)
"괜찮아요?"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요."
"우리 소문이 무성해요."
"우리만 결백하면 되는 것 아녜요?"
"나도 처음엔.. 당신처럼 생각했죠. 우린 그들과 다르다고.
근데 틀렸소. 당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떠나야 해요."
"날 사랑했다는 말인가요?"
"나도 모르게...
처음엔 그런 감정이 아니었소. 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갔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이 남편과 있다고 생각하면 미칠 정도로... 난 나쁜 놈이오.
부탁이 있소."
"뭐죠?"
"미리 이별 연습을 해봅시다."
"옛날엔 뭐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곤 진흙으로 봉했다 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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