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로는 K와 헤어진다면 내가 떠안고 있는 불안을 한 순간에 덜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잃는다는 상상 역시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 K야, 나는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워.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점점 지름이 좁아드는 깔때기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아닐까. 의자뺏기 게임을 할 때처럼 흥겨운 노래에 취해 의자를 놓쳐버리면 아무 데도 앉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멀뚱하게 서서 의자에 앉은 아이들의 안도하는 얼굴을 바라보게 될까 봐 나는 몹시 두려운 거야.

- "그럼 나쁜 사람이구나."
"그래, 그놈은 나쁜 놈이라니까, 아주."
"그런데 그 애가 나쁜 놈이면 안 되는 거니?"
"...."
"이제 아무것도 아닌거야, 모두 지나간 일들이니까."
"그래, 그건 나도 알아."

Y에게, 나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잔인한 일 같았다.

"누군가 다른 여자가 있었다 치자, 없었다면 달라졌을까?"
"...."
"괜찮아?"
"나한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과거가 뭘 말해줄 수 있겠니? 뭘 증명할 수 있어."
"지나간 일들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진 마."

나는 결국 말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내 고통이 중요했다.

-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때 K가 느꼈던 느낌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해 그 가을에, K와 나는 각자 무엇에선가 달아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서로에게서 벗어나면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불안한 기운에서 달아날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도.
나는 K를 원했지만, 한편으론 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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