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 비행운

from 도서 2018. 5. 20. 22:11

비행운 김애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답한 것은.

- 광합성을 하는 사람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 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감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떄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 그 사이 언니에게도 몇 줄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겠죠?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단순히 기회비용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

그래서 사실 오늘 언니가 8년 동안 임용이 안 됐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 속에 생기는 
온갖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를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 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그리고 그때 저를 위로해준 건, 제가 직접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었어요.
욕망이나 쾌락은 그 다음 문제였지요.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온기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만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요.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거에요.

-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중략)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중략) 언니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무얼 하면 좋을까요.

(중략) 그리고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생각을 해요. 
그때 그 애가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략)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