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르던 오만과 편견을 이제야 읽었다...
1. 초반부 넘어가기가 힘들다. 인물 관계가 제법 복잡하고, 주인공집 딸만 다섯에... 사교/무도회 등의 익숙치 않은 배경 안에서 인물을 파악해 나가야 하는데, 진도가 잘 안나간다. 특히 다소 시덥지 않은 girl's talk적인 면이 많아서 다소 지루할 수 있다.
2. 그런데 중반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완전 빠져들어 거의 밤 새가며 읽었다. 일체의 성적 묘사 없이도 이렇게나 설레는 연애 소설이 있었다니!! 과연 고전이라 부를 만 하다. 특히 인물 / 인물의 심리 묘사가 정말 탁월한데, 괜히 엘리자베스한테 감정이입해서 두근두근.........
3. 엘리자베스 베넷은 단연코 최고의 캐릭터.... 지혜롭고 생기발랄하고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제인&엘리자베스 자매는 여태 본 모든 문학 작품의 자매를 통틀어 제일 매력적이다.
4. 여러 차례 개작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세월의 힘인지 탄탄한 스토리 전개와 적당한 반전의 묘미, 섬세하고 아름다운 묘사가 모두 훌륭하며 잠시나마 19세기 영국에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
5. 이 책은 서점에서도 연애/사랑소설에 분류되어 있고, 여류작가가 지극히 한정적인 주제밖에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에 부합하며, 결국 돈많고 잘생긴 다이시에게 엘리자베스가 시집가는 결말을 통해 '결국 남성에게 의존적인 수동적인 여성상' '결혼에 좌지우지되는 여성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결점에 연연하는 것은 이 소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고 본다. 특히 복잡한 이 소설의 인물/연인 관계에 주목하여 이러한 비판을 뛰어넘을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이 소설에서 '상정 가능한 여러 형태의 결혼상'을 주욱 제시하고 있다. 현실적인 타협으로 이루어진 샬럿의 결혼, 욕망과 쾌락만을 추구한 리디아의 결정 등이 먼저 나열되고,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엘리자베스와 다이시의 결혼이다. 엘리자베스의 '결말'이 '부자/훈남'과의 결혼이라고, 그녀가 그를 '돈'과 '외모'의 기준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극단적인 혐오에 가까웠던 감정이 점차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의 엘리자베스의 심경 변화 및 변화 이유, 판단 기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를 움직인 것은 다이시의 진심이고, 편지에 담겨있는 절절한 마음과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러나온 그의 인간성이고, 우여곡절 끝에도 변하지 않은 그의 애정에 대한 신념에 있다. 물론 그가 '돈이 많아서' 리디아를 구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가 그의 드넓은 영지에 혹한 것도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본인이 말하듯,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의 차이'는 불명확하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과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의 구분은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엘리자베스의 판단 과정에서 이성 아래서 이루어진 성찰, 고뇌의 흔적을 엿볼 수 있고 이는 엘리자베스를 1차원적인 수동적 여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결과론적이고 단순한 오판임을 알 수 있다.
6. 여튼 엘리자베스 사랑스러움....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그녀가 버릇없어보일 수도 있지만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반박은 언제나 환영. 무지에서 비롯된 순종보다는, 이성과 양식에서 나오는 재기발랄함이 몇배는 사랑스럽다!
p.31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달느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p.71
"겸손한 척 하는 것 보다 더 기만적인 것도 없죠. 겉보기엔 겸손해 보이는 것도 때론 단지 무성의일 뿐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자기 과시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조금 전 내 겸손을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하겠나?"
"간접적인 자기 과시지. 실은 자네는 글을 아무렇게나 쓰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든. 자네는 그게 생각을 빨리 하는 데다 표현은 대충대충 하는 데서 나오는 결함이라고 여기고 있고, 그것이 멋있는게 아니라면 적어도 대단히 흥미로운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떤 일이든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실행 과정의 불완전함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마련이지."
p.76
"자, 이제 절 경멸해 보세요. 그럴 수 있으시다면."
p.219
"근데, 외숙모.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p.315
선함과 선함의 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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