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 밝은 밤

from 도서 2021. 11. 9. 23:19

@궁뜰어린이공원 @책바

생일에 책 선물을 몇 권 받았는데 너무 좋았다.  취향을 헤아리고 마음을 써줘서, 잊고 지내던 감정들을 다시 들여다볼 기회를 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읽은 지는 조금 되었지만 좋았던 감정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인상깊었던 문구를 아카이빙.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이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중략)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너는 너를 다그쳤기 때문에 더 나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었다면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을거야.  넌 더 단련되어야 해.  이런 취급에는 이미 익숙해졌잖아.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이게 꿈이에요.  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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