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2012)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가 제 초점이었어요. 개인에게 생긴 슬픈 일을 슬퍼하는 건 당연하죠. 관건은 타인에게 일어난 슬픈 일을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는 것이죠. ‘슬픔의 연대’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요. 2008년 여름, 시인 될 궁리만 하던 때였습니다. 20살 때부터 신춘문예에 줄창 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우병 촛불집회가 열렸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 되는 법은 학교나 강좌에서 배우는데, 시민 되는 법은 어디서 알려주나.’ 저희가 정치의식 있는 세대는 아니지만, 그때부터 집회에 자주 나갔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어요. 용산참사 때도 그냥 걸어서 주변에 서 있다가 돌아오고…. 그때부터 ‘타인의 슬픔’에 대해 적어볼까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 깊은 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겠죠. 단지 그 슬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거기에 개인의 슬픔이 섞이니, 결국 슬픔의 절대량이 늘어났습니다.”

“제가 사회 속에서는 밝은 마스크를 쓰고 잘 살아가지만, 기본적으로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만나서도 할 말을 잘 못해요. 그게 제 첫번째 후회입니다. 후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기’입니다. ‘그때 괜히 그래서…’ 하는 거죠. 하물며 연애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서 후회할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단, 제 시에 ‘당신’ ‘미인’ 같은 호명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모두 연애 상대는 아닙니다. 연인이기도 하고, 강이기도 하고, 정치인일 때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은 누나이기도 합니다. 내 옆에 없으니까 후회되는 일이 많죠. 그런 감정들이 연시의 톤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사랑시는 사랑을 시작해 두근두근하거나, 막 끝났을 때는 못 써요. 마치 컴퓨터 폴더 안에 있는 몇 년 전 여름 사진을 꺼내보듯이 써야죠.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라옵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01121722005#c2b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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