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2013)

from 영화 2013. 10. 5. 16:58

소원


소원(2013)
by 이준익 / 설경구, 엄지원

2013. 10. 5 @ 부대...

★★★★☆



1. 조두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 ‘아동 성폭력 피해자를 주제로 한 영화’라는 들었을 때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들 - 넋나간 피해자, 가족들의 오열, 뻔뻔한 피해자, 솜방망이 처벌,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이에 대한 분노까지 - 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다. 이는 소재 자체가 내포한 한계라 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큰 감동을 준다. 초점을 살짝 틀어 가해 행위에 대한 고발보다 피해자가 조금씩 회복되는 모습, 어떻게든 희망을 찾으려는 한 가족의 몸부림에 맞췄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2. 더 이상 정상적으로 용변을 볼 수 없는 소원이... 당황한 아버지가 다급히 소원이의 속옷을 갈아입히려 할 때 소원이는 ‘벗겨짐’의 행위에서 아픈 경험을 떠올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 위에는 범죄자의 모습이 덧씌인다. 이불을 뒤집어쓴채 아버지를 거부하는 소원이, 문 밖에 숨어 힐끗힐끗 소원이를 쳐다보며 맘 졸이는 아버지, ‘코코몽’이 되어서밖에 딸과 소통할 수 없는 부녀의 거리.. 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고 어찌할 도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회복되어 학교에 돌아온 소원이가 코코몽! 아빠야제? 할 때의 가면 속 설경구의 흔들리는 눈빛, 손수 가면을 벗겨 아빠의 땀을 씻어주는 소원이의 손길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희망의 증거’이다. 코코몽 댄스(?)를 선보이는 어머니, 바스락거리는 용변 주머니를 가리고자 사탕 가방을 만들어주는 아버지, 문방구 앞에 붙은 격려 문구, 소원이 동생 소망이.... 희망의 조각들을 꿰어 어떻게든 상처를 가리고, '아이고 죽겠다' ‘왜 태어났나 싶'음에도 힘든 삶을 꾸려나간다.

3. 물론 이 영화에서 찾은 희망은 비현실적이다. 영화에 묘사된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을 돌보는 사회와 공동체의 모습은 ‘판타지’에 가깝다 할 것이다. 희망의 순간으로 가려지지 않는 좌절과 불행의 나날은 얼마나 길고 어두울까. 무자비하게 파괴된 내장을 들어낼 때의 고통,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삶의 본질에 대해 회의해야 하는 현실은 결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4. 이러한 난점이 있음에도... + 이준익 감독이 피해자에게 2차, 3차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고서라도 이런 영화를 만든 건.... 아마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사회적 움직임이 생겨서 아픈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즉 감독 자신이 그린 판타지적 세계에 어떻게든 현실을 조금이나마 조응시켜보고자 하는 노력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5. 유기징역 상한은 15년, 가중처벌해도 최대 25년... 그런 측면에서 심신미약 감경사유 적용해서 12년이면 그렇게 짧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주위에서 '저딴 새끼는 목매달아 쳐죽여야 된다' '판사새끼 지딸이 당해봐야 정신차리지' '적어도 무기징역 아닌가'라는 아우성이 들려서 퍼뜩 정신이 났다. 13년 6월부로 성범죄 관련 법률은 강화되었고 거의 모든 성폭력 범죄에서 음주, 약물로 인한 감경 사유는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국민 대다수의 법감정에 맞추어 법은 엄격해지고 있으나.... 하지만, 인용하자면,

'법이 약해 강간범이 활개친다는 주장은 여타의 고민을 중세적인 "쎈 법"에 모조리 떠넘기겠다는 직무유기에 가깝다. 꼴도 보기 싫은 저 강간범을 죽이거나 내 눈앞에서 영원히 거두라는 외침은, 그 피의자 또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고작 '내 세계'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반사회'적인 주장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법은 '나'의 정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천만의 다른 정의가 타래진 '사회'의 정의를 통해 완성된다. 고로 어떤 강간범은 영원토록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 역할은 법을 집행하는 국가의 몫임과 동시에 사회 구성원 스스로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왜 강간범을 태워죽이지 않냐고? 그 성에 차지 않는 형량의 '여백'에 우리와 국가가 해야 할 나머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국가-개인이라는 1:1의 관계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개인이 보기에 별 신통찮을 근대법체계 속에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그 체계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고,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잘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근대를 누리며 늘어놓는 탈근대적 투정이나 순간적인 격정의 의의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형법관련법의 제정 및 개정에 있어서는 형법이 가지는 보호적 기능과 관련하여 형법의 최후수단성·보충성의 원칙(Subsidiaritätsprinzip)에 충실한 입법이 요구된다. 일반인의 법감정에 근거한 보호목적 우위의 입법은 테러형법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자칫 보호를 갖아한 침해가 될 수 있다. 실제에 있어 입법자는 여론을 의식하여 범죄화에 따른 상징적 효과 때문에 집행할 의도나 능력도 없이 중벌화 입법의 유혹에 빠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입법들은 내용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
(이와 관련해 배종대 교수는 "형벌이 최후수단이라는 말은 교과서 속에나 있는 말이고, 현실에서는 최초수단(prima ratio)이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의해 자기결정·자기책임을 강요당한 개인은 자신의 필사적 생존을 위해 사회적 연대로부터의 개별인간으로서의 정신적 여유나 관용을 상실한 채, 범죄의 사회성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짐이 없이 엄벌에 의한 치유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엄벌의식이 '이물질로 생각되는 것'의 배제·배외의식에 연동됨과 함께 의심과 불안감을 재생산함은 물론 새로운 범죄를 재생산하게 된다. 여기에서 엄벌주의는 문제는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범죄행위는 사회에 적대적인 것이지만 범죄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향유주체이며 인권의 주체라는 것은 변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형법의 기본원리인 행위책임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형법은 행위책임이며 행위자형법이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처벌받은 것이지, 그의 상태 때문에 처벌받은 것은 아니다. 흉악범죄인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사고는 헌법(제10조)이 보장한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권은 기본권의 구체인 인간 누구에게나 심지어 범죄자에게도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 자체에서 존엄은 보장되어야 하며 인간은 자유롭게 처분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는 존재이며, 범죄자는 범죄행위로 인해 필요최소한도 내에서 일정한 기본권이 제한될 뿐 일반인의 국가형벌권으로부터의 과도한 보호욕구로부터 인권이 보장되어야 할 지위에 있다. 이러한 자기구속의 법원리는 일반국민과 범죄인은 고정된 지위가 아니라 일반국민도 내일의 범죄자 지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http://cryingkid.egloos.com/3407401
- 이재석, "형법의 중벌화 입법경향에 관한 비판적 고찰", <법학연구> 44, 2011, 204-218쪽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6. 하여튼 이 영화가 주는 감동에는 변화가 없다. 시커먼 군인들도 눈물 줄줄 흘리며 본 영화.. 여성분들 눈화장 조심하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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