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

- 나는,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게 아니며, 어쨌던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늘 엉뚱한 대답이나 하고 야심이 없으니 그건 사업하는 데는 대단히 좋지 못한 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로 돌아와 일을 했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삶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 마리가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결혼을 원하는 쪽은 그녀고, 나는 그저 그러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중대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냐."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없이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녀는 다만, 자기와 같은 식으로 사귀게 된 어떤 다른 여자가 똑같은 제안을 했어도 내가 받아들였을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또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언젠가는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내가 싫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내가 더 보탤 말이 없어 잠자코 있자, 마리는 미소를 띄면서 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게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단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그가 말했다.  "내가 볼 때,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하나의 불행. 그게 뭔지는 누구나 다 압니다. 불행이라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겁니다. 에, 또! 내가 볼 때, 그건 하나의 불행입니다."

그는 더 계속하려고 했으나, 재판장이 됐다고 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셀레스트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간단히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셀레스트는 또다시 그것은 하나의 불행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재판장은 "네, 알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그러한 불행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말했다.

자신의 지혜와 성의를 다했으나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는 듯이 셀레스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번쩍이고 입술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위해 자기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에게 묻는 듯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으나, 한 인간을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신문에서는 흔히 사회에 대한 부채를 말하곤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탈출의 가능성, 무자비나 의식 밖으로의 도약, 희망의 모든 기회를 제공하는 광란의 질주였다. 물론 희망이란, 힘껏 달리던 도중 길모퉁이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호사를 나에게 허락해 주는 것은 아무 도 없고 모든 것이 나에게 그런 호사를 금지하고 있었으니, 기계 장치가 나를 다시 붙잡는 것이었다.

- 아무리 해 보려 해도 나는 그러한 오만방자한 확실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확실성에 근거를 제공한 판결과, 판결이 선고된 순간부터의 가차 없는 전개 과정 사이에는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문이 17시가 아니라 20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으리라는 사실, 속옷을 갈아입는 존재인 인간들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프랑스(혹은 독일, 중국) 국민 같은 지극히 모호한 개념에 의거하여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이 그 결정의 진지성을 많이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고가 내려진 순간부터 그 선고의 결과는 내가 몸뚱이를 짓뭉개고 있던 그 벽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심각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죄인이었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잇었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 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해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방인에 대한 편지(파리, 1954년 9월 8일, 알베르 까뮈)]

- 뫼르소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거기서 어떤 정직성의 모럴을,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기쁨에 대한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찬양을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둠이라던가 표현주의적인 희화라든가 절망의 빛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판 서문(알베르 까뮈)]

- 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의 공식에 따라 스스로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그 점에 대해서 진정하게 뉘우치기봐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 여긴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뉘앙스 때문에 그는 유죄 선고를 받는다.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로제 끼요)]

- 이방인은 우선 한 인간입니다. 이방인은, 가장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무관심[혹은 무차별(indifference)]이 윤리의 한 형식이라고 믿는 인간입니다.  뫼르소에게는 모든 것들이 무관(indifferent)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결혼하는 것과 결혼하지 않는 것, 범속한 장례식과 종교적 장례식, 직장에서 승진을 하는 것과 승진을 하지 않는 것이 다르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시신을 옆에 두고 밤을 새운 다음 양로원의 늙은이들이 악수를 청하자 그는 그들과 친근해진 증거라고 느낍니다. 잠시 전에는 그들에게서 적의를 느꼈던 그가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의 반응에 대하여까지 무관심하다는 사실입니다. 날이 새자 그는 자기 사무실 동료들이 그때쯤 출근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자기는 잠에서 깨는 그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어떤 다른 사람의 관심사이기나 하듯이,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에 좀 정신을 팔고 있었지만, 건물들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주의가 산만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보기를 거절할 때도 왜 거절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아뇨."라고만 합니다.  요컨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방인인 것입니다.  마치 그의 감정들과 그가 그 감정을 체험하는 방식 사이에 어떤 괴리가 존재하기라도 하듯이. 그 감정들이 그를 스쳐 가기만 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입니다.

- 뫼르소는 마리에게도 재판관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과장해 불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간결한 표현과 완서법(litote)*이 특징인 인간입니다. 폴 발레리의 표현을 빌리건대, 그는 가장 적게 말함으로써 가장 많이 말합니다. 그가 파멸하게 되는 것은 웅변적인 수사를, 어떤 유의 언어상의 낭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완서법: 완서법은 수사법의 하나이다.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그 반대의 의미를 부정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를테면, 「좋다」 대신에 「나쁘지 않다」라고 말하거나, 「어리석다」 대신에 「현명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방법이다.

[작품 해설]

- 그는 작가수첩 I(72쪽)에 다음과 같은, 인생관의 중요한 변화를 암시하는 듯한 기록을 남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결혼, 출세 등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는데, 패션 잡지를 읽다가 문득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삶(패션 잡지에서 말하는 바로 그러한 삶)과 무관한 존재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 1부 - 그때까지의 삶. 2부 - 유희(le jeu). 3부 - 타협의 거부와 자연 속에서의 진실."

- 작가수첩 I(146쪽)에서는 까뮈의 소설 미학의 한 핵심을 이루는, 다음과 같은 성찰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그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 - 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과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 "우리들 각자는 최대한의 삶과 경험을 쌓아 가지만 결국 그 경험의 무용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만다.  무용함의 감정이야말로 그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는 또한 "그렇다고 해서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중략) 피에르 앙리 시몽이 지적했듯 사르트르와 달리 "카뮈에게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활동 속에서도 삶의 무용함에 대한 의식은 그 활동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만들었다. "행동의 한복판에서 행동에 가담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행동에서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라고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는 말했다. 부조리에 대한 의식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로,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고,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에 의하여 유한하게 한계가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삶은 더욱 귀중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의 절망이 아니라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입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어두운 밤 시간이 등장하지 않는, 영원한 여름, 영원한 태양의 소설 이방인의 진정한 결론입니다.

 

나에겐 구원같은 책.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나를 몇 번이고 일으켜준 책. 1부는 "정다운 무관심" - 무관심에 대한 위로 내지 허무에서 오는 동질감을, 2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도 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역자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우나, 이를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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