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마을
연차를 쓰고 조우한 공간과 시.
(연차를 쓴 날 저녁에 출근해서 이러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책임감인가, 극단적인 회피의 양태인가?)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그래도 밤하늘의 별들은 얼어붙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고독은 꾸준히 생산되지만 아무도 고독을 소비하지 않는다
(후략)
봉쇄 수도원
(전략)
푸른 전등의 새벽. 이 푸른빛은 어디서 오는가.
고요한 침묵의 사다리를 타고 나의 다락방으로 스며드는 이 새벽의 전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아무리 봉쇄해도 봉쇄할 수 없는 내면의 푸른빛
나의 글은 그 푸른빛에서 와서 태양이 불을 밝히는 시각에 사라진다
목이 마르고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작은 화분의 푸른 잎들을 스치며 지나간다
(중략)
태양이 사라진 지구의 한편에서 달의 전구를 밝혀 놓고 고요히 밤을 적어나간다.
밤은 태양이 남겨둔 기억의 그림자. 그림자를 밟으며 고독하게 유령이 걷고 있다
(중략)
가출 혹은 여행의 삶.
희미한 공기처럼 세계의 골목을 떠돌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죽으려 했던 나의 꿈이.
이렇게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내면의 푸른 기억을 적어나가는 새벽이면
가장 먼 곳에서 반짝이며 나를 부르는 골수분자 같은 삶. 질기고도 비린 유전자의 집.
나는 유령이었고 사는 동안 나는 끝내 유령일 테지만
새벽 네 시 나는 드디어 나에게 갇힌다. 봉쇄 수도원.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지포 라이터 관리술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전략)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맥주 가게와 담배 가게를 다 지나면 아직 야근 중인 엥겔스의 공장 불빛이 빛나고 마르크스의 다락방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빛 아래서 누군가 끙끙거리며 생의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지
누군가는 아프게 생을 밀고 가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밤을 탕진해도 되는 걸까 생각을 하면 두려웠지 추웠지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너의 노래를 따라 불렀지
(후략)
- 그의 시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읽어야 한다. 새벽 서너 시쯤 혼자서 중얼중얼 소리 내야 한다. 박정대 시인(49), 그의 얘기다. “오전 10시 은행 창구 앞에 앉아서 내 시집을 읽으면 현실의 모든 걸 포기하고 죽고 싶거나 ‘이게 뭐야’ 하면서 시집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거다. 밤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서 술도 한잔했고 잠도 안 오고 뭔가 보고 싶을 때 시집을 펴면, 박정대가 쓴 게 아니고 내(시를 읽는 이)가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거다.
- 내가 쓰는 시에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이 담긴다. 현실을 무시한 꿈은 현혹일 뿐이다. 내 시를 보면서 위안을 얻고 진짜 현실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시는 내면적 리얼리즘이다.
- 그는 밝은 대낮에는 충실한 직장인으로 생활하다가 퇴근하는 그 순간 ‘나는 글 쓰는 사람이고 시인이다’라는 자의식을 충전시킨다. 일찍 저녁을 먹고 잠들었다가 밤 11시에 일어난다. 온전한 시인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음악을 듣다가 발동이 걸리는 새벽 서너 시에 시를 쓴다. 글을 쓰다가 고개를 들면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킬 때도 더러 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스스로 시인임을 의식하지 않으면, 예술가적 감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평범한 시민이 될 뿐이다. 내가 헌신하는 예술적 시간을 위해서 그 나머지를 희생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0129/60469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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