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최승자를 생각하지 않고 한국의 여성시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승자는 한국의 여성 시인에게 덧씌워진 '여류'라는 이름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시인이다. 그것은 남성중심적인 상징질서에 의해 규정된 '여성적인' 시적 감수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위악과 피학증과 자기모멸과 거침없이 비속한 언어들은 단지 '해방'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의 시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충격적인 전언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어떤 낭만적 환상도 거부한 채, 삶의 불모성과 치명적인 사랑의 위험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자의 처절한 자기 선언이다.
초기시의 매혹적인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 수록된 이 시는 사랑에 관한 최승자 시의 한 절정이다. 이 시는 비유와 관념의 회로를 거치지 않는 사랑의 신체적 고통을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삶을 채우는 것은 사랑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밥'과 '눈물'이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완강한 콘크리트 같은 현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비유로써 말하지 말아야 한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는 '주먹의 바스러짐'만이 구체적인 진실이다.
낭만적 사랑은 불가능하다. 아니,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떤 사랑의 방법이 가능할까? "사랑인지 사람인지"는 '가거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끝내 살아남아 기다리는 것은, 행복의 순간이 아니라. 사랑이 내 몸을 무참히 꺾는 순간이다. 그 순간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꽃병에 꽂힌 몸의 형태처럼 글자를 배치한다. 어떤 희망과 행복의 약속도 없이 다만 꺾이기 위해 기다리는 몸은, 사랑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고통 그 자체이다. 사랑에 관한 한 이 신체적 감각만이 진실이다. 몸이 아프다. 사랑으로부터 몸이 아프다. 고로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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