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든 기분이든 상황이든 내일 스케쥴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맥주보다 조금 더 강한 것이 땡기는 날이 있다. 하지만 내일 할 것이 없지는 않으므로, 너무 강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는 그 마음. 나에게 주어진 공간이 맥주 한캔보다는 넓고 위스키 한병보다는 좁았으므로 와인 코너에서 계속 서성였다.
스스로에게 가혹하므로 예산은 1천엔 이내. 당연히 평가는 가격과 비례. 한국 와인샵에서 (vivino를 의식해서인지 모르겠으나) 흔하게 찍히던 ratings 4.0은 고사하고 3.5를 찾기도 힘들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산토리 아카다마 와인. 일단 스위트 와인에 박한 vivino 답게 ratings는 2.8로 처참한 수준. 그런데 가격 (580엔 - 직구 사이트에서도 단돈 만천원) 말고도, 몇 가지 눈에 띄는 리뷰들이 있었다.
채OO님: 빡스떼기로 사고싶다. Andy님: "와인과 다른 것"으로 접근해서 먹는다면 O. 칵테일 베이스로도 제격. 사츠코님: 다른 분들 리뷰를 보고 소다와리로(탄산수를 타서) 먹으니 맛있었다. COO님: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할머니가 매일 저녁 때 작은 와인잔에 한잔 씩 따라 마시던, 나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인 와인. 일본에서 1907년에 태어난 단맛 와인입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와인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면서도 너무나 그리운.. 할머니와의 추억에 젖어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다른 COO님: 이름부터 "Sweet Wine"이라고 못박아 두었는데 굳이 "달다"고 혹평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탄산수와의 상성이 좋습니다. 기타 자세한 설명: 산토리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untory.co.jp/wine/original/akadama/index.html
대충 마시기 쉽고, 탄산수에 타 먹으면 그냥저냥 맛있는 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더구나 역사도 상당한 것 같고, 일본에서만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인 것 같아서 픽!
(일장기가 떠오르는 빨간 원을 제외하면) 나름 정감가는 디자인. 과연 그냥 먹으니 너무 달았고, 얼음을 타먹으니 조금 나았고, 얼음+탄산수까지 타먹으니 제법 맛있었다("아카다마 펀치"라는 별도 제품도 시판되고 있고, 칵테일 레시피도 있음). 소다와리로 먹으니 어느새 한병 뚝딱. 보기와 다르게 14% / 550ml라서 소주 1병 반 정도 되는데, 너무 취하는 느낌 없이 순식간에 다 먹어서 당황.
소중한 2년의 첫 달이 지났다(작년 단축근무는.. 재택근무도 근무이므로 포함하지 않겠다).
내 성정도 은근히 빡센 스케쥴도 일기에 적합하지는 않으므로, 최소한 한 달에 하나의 기록은 남기겠다 다짐.
우선 나의 솔직한 심정을 요약하면 (i) 일단 쉬니까 너무 좋아. 교토 너무 좋아 진짜 좋아. 그런데 (ii) 쉬고 있는 이 상황이 굉장히 어색해. 빈 시간에 계속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어디 가서 안 돌아오는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서 현실을 버텨야 하는게 내 미래이므로) 그때 너무 후회할 것 같아. 이다.
그래서 뭔가 하려고 안달이 나 있다. 일단 본업인 박사과정 세미나 발제(평균 10~20페이지의 일본어 발제문 작성해서 3~40분 발표, 1시간 토론) 스케쥴.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한가해서 당황스럽고 뭔가 꾸역꾸역 채우려던 와중에, 이러한 글들을 접했다.
1. "우선은, 쓰러진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그런 마음이 발현되는 것이 넓은 의미로는 "병"의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쫓기고,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걸 전부 자책하며 더욱 상처를 깊게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まずは、倒れた自分に鞭を打つような心のはたらきがあること、そしてそれがあらわれることも広義の「症状」のひとつであることを認めたい。動けないほど追い詰められ、傷つい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を全て自責としてさらに傷を深める。それがどれほどつらいことかを理解するところからはじめたい。)
2. 아무리 쉬어도 활력이 회복되지 않는 배경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있다. 만성적인 분노에 의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고갈되고, 움직이지 않아 회복되는 체력 이상으로 피폐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쉬고 있는데 회복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욱 몰아 세운다. (どれだけ休んでも活力が回復しないことの背景に「動けない自分への怒り」がある。 慢性的な怒りによってストレスホルモンは枯渇し、動かないことで回復する体力以上に疲弊してしまっていることがある。それなのに、「休んでいるのに回復しない自分」をさらに責めてしまう。)
4. "진짜 모습의 나는 쓸모가 없어서, 보통 사람들의 몇 배는 노력해야 해" "진짜 모습의 나는 높게 평가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야" 라고, 곁에서 보면 광기 어린 정도의 노력을 하면서, 그럼에도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지쳐서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으면,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야"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해 <책읽아웃-황정은의 야심한책>에 출연하셨죠. 그때도 느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시인님은 참 '애쓰며' 사람을 대하시는 것 같아요.
맞는 것 같아요. 가끔은 그게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애쓰지 말자'를 한해 목표로 세울 때도 있는데요. 만난 그 순간에 진심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요. 시간을 들여서 초대해 주시고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에 진짜 너무 감사함을 느껴서, 그 순간만큼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에 있어서도 애쓰는 편인 것 같고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한 편의 글을 쓸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주어진 시간 동안은 에너지를 탕진하듯이 쏟아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서 에너지를 비축해요.
글쓰기는 평생 지속해야 하는 작업이니까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하면 내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힘을 덜 쓰려는 노력을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당연히 있고요. 지금도 그 거리 조절을 잘 못해서 글 쓰고 나면 한 2~3일 동안 되게 힘들 때도 많아요. 특히, 이번 책에 있는 이야기를 쓸 때 그랬어요. 그냥 가볍게 일상을 스케치한다고 생각하고 접근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요. 자꾸만 저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를 생각할 때 제 기억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재료를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특히, (이번 책에서) 할머니 관련된 꼭지를 쓰고 나서 한 달 동안 글을 못 썼어요. 사실 세 달 정도 걸려서 쓴 글이었는데, 한 문장을 쓰면 눈물이 나고 또 한 문장을 쓰면 눈물이 나니까 '이건 정말 내가 존재를 걸고 쓰는 거구나, 어쨌든 시작했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었어요. 어떻게든 완결을 하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어요. 미로 같은 길을 걸어서라도 가장 진실하게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글이든 제 삶의 조각들이 담기기 때문에, 글 쓰고 난 뒤에 겪게 되는 여운은 늘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감당해야 되는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쓰는 것 같아요.
힘을 빼고 쓰려 해도 도저히 안 되는 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신에 일상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애쓰기는 해요. 혼자 산책 많이 하고요. 여유가 있을 때는 동네 엄청 잘 돌아다니고, 지하철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까지 걸어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오고, 많이 걸으면서 덜어내려고 해요. 그래야 또 앉아서 고요하게 몰두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균형을 맞추려고 나름 애를 많이 쓰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놀라요. 글에서 보는 제 얼굴하고 실제로 만났을 때의 얼굴이 되게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잘 웃고 말수도 많다고 해요. 제 글에서 말도 잘 안 하고 되게 침울할 것 같은 인상을 많이 받으시나 봐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인지부조화를 느끼시는 분들도 있어요.(웃음)
다정한 사람이니까 골짜기도 품고 있는 것 아닐까요? 골짜기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것이고요.
맞는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날 때 반가움을 느낄 수도 있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떤 사람이든 만나면 애처로움을 먼저 느껴요.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있음이 감격스럽고 되게 애처롭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 사람이 혼자 방에서 등 돌리고 앉아 있을 때의 표정 같은 것, 그 '등뼈'를 상상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애처롭고 안쓰러워하고...
'어쩌면 부엉이들이 나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오해하는 걸 수도 있어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지운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존재는 그 모양 그대로 세상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는 입이 없는 그 존재들이 '백지라는 무기'를 가진 제가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감시하는 존재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엄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더 진실한 이야기를 쓰게 하는 파수꾼 같은, 저한테는 부엉이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아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입이 없는 채로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밤이라는 시간 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응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 눈빛을 저는 모른 척할 수 없고, (부엉이는) 제 안의 가장 진실한 밤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저를 망치러 온 구원자 같은 느낌이에요.
'나무뿌리'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김없이 넘어지곤 하는 나무뿌리가 있죠. 시인님의 나무뿌리는 어떤 건가요?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앞에서는 번번이 넘어져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통과 중인 사람들의 얼굴은 제가 귀신같이 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뭐랄까요... 어떤 부재를 경험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저의 나무뿌리인 것 같기는 해요. 모른 척하기가 많이 어렵고요. 그럴 때는 사람들의 신발 같은 걸 되게 유심히 보거든요.
시인님의 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어떤 인상을 받으면 좋으시겠어요?
얘 너무 투명하다.(웃음) 송사리가 살 것 같은 1급수다.(웃음) 저는 맑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줄 때 극찬을 받은 것처럼 기쁜 마음이 되는 것 같아요. 글도 그래요. 너무 투명해서 핏줄이 다 들여다보이는 피부 있잖아요, 제 글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맑음에 대한 갈망이 좀 있는 것 같아요.
맑은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안에 가라앉은 게 많아야 맑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이게 수련이에요. 진흙을 가라앉혀야 눈이 맑아지니까.
생채기라든지 티끌이라든지, 그런 게 없어야 맑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전혀요, 전혀. 나뭇가지도 많이 가라앉아 있고 돌덩이도 가라앉아 있고, 그래야 윗물이 맑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견디기도 해야겠네요.
그럼요. 몰라서 맑은 게 아니라 알아서 맑은 거 있잖아요.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셨어요.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그러니 이제 가세요, 당신의 기억으로." 이야기의 바통을 '당신'에게 넘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이 꼭 직접적인 효용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그 시간을 즐겁게 재미있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이 책만큼은 그 시간을 보낸 뒤에 연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들이 자신이 가야 될 방향이나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연결이요. 각자의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은 제가 갈 수 없는 곳이거든요.
이 책은 금방 읽혔으면 좋겠고, 독자 분들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세계 안으로 들어가셨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테이블을 놓으시고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지, 나한테 가장 내밀하게 또는 의미 있게 남아 있는 사물이나 경험은 무엇인지, 그걸 찾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강했어요. 진짜 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고, 도움닫기 판 같은 것이고요. 독자 분들이 각자의 뜀틀을 넘어서 각자의 기억의 세계로 점프해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Q “슬프다가 막막하다가 텅 비었다가 잠시, 반짝인다.” 이 시집에 대한 제 소감입니다. 이 막막한 슬픔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 것’의 정체는 바로 ‘옆’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이 시집을 묶으면서 단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면 ‘독자들을 먹먹함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다’는 거였어요. 읽었을 때 먹먹해지는 시. 막 시끄럽다가 갑자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고, 울컥하고, 마음의 막다른 곳에 탁 도착해서 멈추게 하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옆’이라는 곳은 눈앞에 없는 사람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재는 없는 게 아니라 없음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옆’이란 그런 의미에 가깝다는 생각이에요. 이미 흩어지고 사라져버린 것들에게 자리를 주고 싶다는 의미. 하지만 다양하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연대의 의미로 읽어도 좋을 것 같고, 무수한 ‘나’의 모습으로 봐도 좋을 것 같고, 죽음의 자리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삶이 보이는 창’ 2017년 봄호에 김중일 시인이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서평을 써주셨더라고요. 제가 본 여러 서평들 중에서 그 글이 가장 좋았습니다. 호평 속에 한 가지 조언도 있던데요, “첨예하게 잡아가는 감각의 균형은 그의 뚜렷한 장점이다. 다만 예술의 아름다움은 대칭과 균형에서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차라리 한쪽이 심하게 허물어진 먼지투성이 폐허 속에서 그것은 자주 발견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떠세요? 평소에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인가요?
정말 애정 어린 조언이네요. 저도 굉장히 동감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 시가 ‘착한 절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무 착하고 너무 올바르다는 거죠. 처음에는 속상했어요. 그때는 시를 예쁘게 잘 쌓아올리는 것에 심혈을 많이 기울였거든요. 그게 시를 쓰면서 힘들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요즘에는 좀 못나 보여도 못남을 인정해주려고, 결벽을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매끄럽게 쓰는 것보다 오히려 못나서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Q 안희연 시인에게 시의 촉매는 뭔가요? 무엇이 시를 시인의 밖으로 나오게 하는지.
부끄러움이에요. 인간은 부끄러움을 잃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부끄러움은 인간에게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한 그나마 제 삶을 책임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4년 만에 이사. 사실 회사랑 멀어지는게 귀찮기도 하고 마냥 기쁜 마음은 아니었다. 근데 세상에 이사온 집이 너무 좋아서 ㅠㅠ 이사 만족도 200%. 숲뷰 + 새소리 풀벌레소리 + 휴양림마냥 몰려 들어오는 맑은 공기 + 에어콘 안틀고 잘정도의 쾌적함에 정신없음에도 행복지수 upup. 시간 단위로 바뀌는 하늘 색 보는 것도 너무 행복하다
걱정했던 출퇴근도 아직까지는 OK. 돌이켜보면 버스 통학길/퇴근길을 참 좋아했었는데. 하루를 견뎌낸 뿌듯함과 어딘가로 이동하는 그 감각이 진짜 좋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듣는 음악도 진짜 달큰했는데. 그런 감각들이 되살아나서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직주근접이라 너무 편했지만, 나의 일상이 회사와 뒤엉켜져서 매일 뒤죽박죽인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이 회사와 20분만큼 간격이 생겨서 마음만큼은 지금이 오히려 편하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8정거장이 주는 나름의 행복과 여유에 감사하는 마음.
+ 더워서인지 힘빠지는 일이 많았는데 오래간만에 지친 마음에 용기를 주는 노래를 찾아서 기록. 이거 듣다가 울었다는 사람 많던데 나도 마을버스에서 울컥했다 ㅠㅠ 따뜻하고 예쁜 노래를 들어도 짜증만 났는데(짜증 안난척 하느라고 더짜증) 이건 나의 부정적인 마음을 부숴버린 강력한 희망인 것이다 라이브가 찐. 근데 짱구 ost라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뭔가 기록할 것이 많은 봄인데, 좋은 곳 예쁜 풍경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날들이었는데, 묘하게 충족감이 덜하다.
옆에 있는 소중한 것들에게 충실하면 될텐데, 생각보다 마음이 쉬이 열리지 않아서 걱정이다 ㅜㅜ
나답지 않게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남은 날들을 조금은 초조하게 헤아리다가, 물음표 가득한 기분으로 옆을 보면 그 뽀얀 질감이 싫지는 않은데 뭔가 아직 와닿지가 않아 ㅠㅠ
여전히 이질감이 들고 건드리면 안될 것 같고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이 해결해 주련지...? 아직은 의문투성이이고 갈피를 못잡겠다.
대신 올 봄 의외의 소득은 "후배의 고마움"이었다.
서로 사정 다 아니까, 일부러 그러는거 아니니까, 무거운 짐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한테만 지워지니까, 나도 배우고 싶고 한참 성장할 시기니까, 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제가 할게요!
로 일관하다가 내 능력 밖임을 깨닫고 몸서리치던 새벽 ㅠㅠ 미리 해놓을 걸 하는 자책 내 능력 이상의 일을 떠넘긴(?) 선배에 대한 원망 밤샘으로 인한 피로감 무지로 인한 좌절 억울함 슬픔 졸림 등등의 감정과 싸울 때, 생각지도 않게 손내밀어 준게 후배들이었다.
선배 고생하는거 다 안다고 ㅠㅠ 선배 구해야 된다고 내 일 다 가져가고 ㅠㅠ 시키지도 않은거 먼저 하고 ㅠㅠ 인차지가 당연히 해야 하는거 금요일 밤 늦게까지 자기일처럼 챙겨주는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텐데 ㅜㅜ
그래서 나도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야지 하고 힘을 냈던 것 같다. 어떻게 선배가 조금이라도 덜 번거롭게 잘 서포트할까..? 만 고민했었는데, 휘청거릴 때 후배가 받쳐주는 기분을 처음 느껴서 되게 되게 고맙고 황송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잘해주는 후배들이 자랑스럽고 기타 등등...
오래간만에 테니스. 숲 냄새 맡으면서 좋은 사람들이랑 같이 땀흘리는거 너무 좋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안녕 내 첫 베토벤! 1번 1악장이라서 뭔가 느낌이 좋다.
베토벤은 처음이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어려웠는데 쉬프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만하임 로켓 발사!
명상을 하다 보니 단 5분도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미간에, 턱에, 손끝에 감각을 집중하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해왔고 앞으로 해야할 일들, 나를 스쳤던 많은 사람들, 못내 걸리는 몇몇 감정들, 아쉬웠던 순간들이 쉴새없이 머리를 휘젓고 다녀서 자꾸 생각이 흐트러진다.
외부의 방해 없이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새삼 깨닫는 시간들.
좋아하는 문체의 글은 아니지만,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조금 옮겨봄(CHUIDASUN GUIDE - 내면을 향한 여행 중 인용).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아래 문장마저 오글거리거나 역겹게 느껴진다면 다시 자기혐오가 스스로를 잠식하고 있는 상황일테니...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나를 돌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질 것!
취다선의 아침 - 나에게 보내는 사랑의 헌장
나는 이 광활한 우주에 단 하나 뿐인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 나 반듯한 모습을 내 안의 나에게 비출 때 나는 세상으로부터 당당하며 떳떳합니다. 이런 나 자신을 나는 늘 아끼고 보살핍니다.
아침의 잠에서 깨어난 나는 "반가운 사람, 잘 잤어요? 그대를 환영합니다" 나의 몸과 영혼에게 속삭여 인사하지요. 나는 사랑이며, 자비이며, 아무런 조건 없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 마음, 본래 본시 순수한 영혼이며 몸입니다.
창을 활짝 열고 아침의 새로운 공기를 맞아들이며 상쾌한 기분을 느껴봅니다. 아침에 만나는 차는 녹차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차와 선이 같다고 하여 선다일여(禪茶一如)라 한답니다. 이 따뜻한 차가 내 몸으로 들어와 세포가 이완되고 뇌가 깨어나며 맑아집니다.이 기운을 빌려 나는 나를 만납니다.
코끝에 마음의 눈으로 의식을 모으로 호흡을 시작하지요.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단순한 이 동작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몸과 마음의 이완 속에서 나의 호흡은 가지런해지고 고요함에 깊어집니다. 이윽고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함을 느낍니다. 그 평온함 속에서 환한 미소 기쁨이 샘솟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조용히 나에게로 돌아와 저녁의 잠자리에서 나는 내게 또 이렇게 속삭입니다. 오늘 참 수고 많았어요!
개인적으로 죽음, 특히 가족의 죽음이라는 소재는 다소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와 주변인의 모든 감정은 극대화되기 마련이고, 참회와 회고로 가득찬 그 감정들은 너무나 익숙하다. 물론 쇼코의 미소에서는 쇼코-할아버지, 소유-할아버지, 쇼코-소유로 구성된 입체적인 관계에서 앞의 감정들을 조금은 다르게 조명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건 익숙한 거다.
아득바득 꾸역꾸역 살아 나가야 하는 우리네 삶은 얼마나 긴가. 삶의 어디를 조명할지는 작가의 자유지만, 그래도 생의 한가운데 서있는 나로서는 조금 더 앞부분을 비춰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소유가 좇던 꿈이나 좌절과 관련된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아쉬운 점도 많은 소설이었지만 몇 가지 와닿았던 구절을 남겨 본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와서 실망했지" 쇼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아주 작게 열고 한숨을 쉬듯 했다.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어디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불에 타다 만 발바닥" "등이 꺼져버린 하이웨이 위의 가로등" "썩었으되, 그것 뿐인 씨앗" "발을 맞춰 걷지 못하는 군인" "의욕 없는 독재자" "전형의 반대말" "그러나... 전형"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의 이상한 메아리" "얼어죽기 전까지 바닥을 찍는 비둘기." 쇼코는 그림들과 그 제목을 다 소개한 후후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쇼코."
창작이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고,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이고, 내가 머무는 세계의 한계를 부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늘 돈에 쫓겼고, 학원 일과 과외 자리를 잡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돈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이미 직장에서 대리 급이 된 친구들과는 돈 씀씀이가 확연히 달라졌고 그 애들은 내가 밥값도 내지 못하게 했다. 친구들의 배려였지만, 그런 작은 일들 하나하나가 자존심을 긁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들은 주말이면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고, 틈틈이 책을 읽었지만 나의 독서량은 그애들보다도 빈약했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었고 매일 매일 괴물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알코올중독자가 된 감독 지망생과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며 야근 수당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나리오작가 지망생을 보며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 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 처럼 연기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 간다.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 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들 이해해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 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토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너 말이다, 이런 말은 처음 해보는데." "...." "나는 네가 이렇게 큰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 가서 공부도 하고 영화감독도 되고. 힘든 대로 손 벌리지 않고 네 힘으로 살고. 까짓것 다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직장에 나간 엄마 대신 나를 업어 키운 그였다. 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효도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 등을 돌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평론)
남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 자기만의 개성과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거나, 다른 사람을 흉내냈다는 평가이다. 전통적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척도였던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진부한 아름다움은 추함이 아니라 그 이하이고, 참신한 추함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그것이 전통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현대적인 미의식이며,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상품이나 아이디어를 비롯, 일상적인 생활 감각의 수준에서도 통용되는 감각적 평가의 기준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감각세계의 으뜸가는 척도인 것이다.
"이제 혼자"라는 쇼코의 말의 주어는 술어와 모순되는 "우리"였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역설을 각각의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이 성숙한 유대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수준에서라면 전이와 역전이는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댐과 기댐 받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 즉 서로 기댐의 수준에서 마음의 흐름이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진동하는 모양새를 뜻한다. 둘 사이에 완벽한 일치란 존재할 수 없으니 정서의 낙차와 흐름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낙차란 언제든 역전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물매 자체가 크지 않아 그 마음의 흐름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