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가장 말단 세포 조직에 해당하는 일개 병으로 군생활을 하다 보면, 역사를 통틀어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전세계 많은 병사들의 면면을 떠올리게 된다. 세력의 충돌로 요약되는 거시적인 전쟁사에 그들 개개인의 삶과 감정,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겠지만,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비슷한 곳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에도 군역은 존재했고, 그 이전에도, 까마득한 과거에도 군대 혹은 그 유사한 합법적(?) 무력 행사 기구는 존재했다. 심지어 불과 60년 전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그 흐름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 이와 대동소이한 우리의 군생활도 훗날 역사책 한켠의 '2000년대 대한민국의 징병제도'라는 카데고리 안에서 다뤄질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 병사 개개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내 군생활도 반복되는 경제 주기마냥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국가 간의 알력 속에 자세력의 체제 유지용 국방(?)의 일부를 구성하는 이름 없는 하나의 점 정도, 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튼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던 과거와 달리, 집단에 예속되어 규칙적인 삶을 살며 느낀점은 '개인의 삶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학업과, 사랑과, 가정과, 우정을 가꾸고 키우는 텃밭은 언제든지 총성과 포탄 속에 불바다가 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내가 그 목적과 상황에 동의하지 않고 동참을 거부하려 한다 해도 나에게는 그러할 권리가 없다. 어쩌면 내가 사회에서 누리던 선택의 자유가 전체 인류사를 통틀어 '비정상적으로' 많이 주어진 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편린으로서의 우리는 그 시대의 물결이 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굳이 전쟁과 군대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생활과 문화만 해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시대에 중국어를 배웠듯 우리는 현재 최강국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고, 서당에서 한글이 아닌 한문을 가르쳤듯 영어유치원과 조기유학이 성행하고 있으며, 불과 수십년만에 의상, 식문화, 유흥 문화 등 모든 것이 서구화(미국화) 되었다. 텝스 책을 붙잡고 씨름하는 나의 모습이 사서삼경을 읽던 나의 조상님의 모습과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던 과거의 모습이나, (세력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진보된 사회의 양상에 따라서 형식적 평등을 전제로 규정된) 한미 동맹 관계에 따라 미국에 안보 및 국가 체제 유지를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재나 형식상의 차이나 존재할 뿐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이건 누구의 바램,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고 우리에겐 그 상황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시대의 요구 앞에 무기력하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삶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한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개개인을 구분짓고 차이를 발생시키는 부분은 이 작은 부분의 합이 아닐까. 시대가 규정짓는 거대한 가치에 휘말려 허황된 꿈을 좆는 것 보다는, 치밀하게 구성된 거대한 흐름을 하나의 현실, 내 삶의 전제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 내가 바꿔나갈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부분에서 나의 행복과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한 힘들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약간의 변화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무기력하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나의 공간에 충실하고 그곳에 나의 색깔을 입혀 나갈 때, 그리고 그러한 점을 모두가 자각하고 조금씩 무언가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개인은 사회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하나의 주체적인 자아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반복되는 삶 속의 아주 잠시일지라도, 부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