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10월

from 일상 2024. 10. 26. 23:39

감정은 호르몬의 산물이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다른 호르몬을 생성하면 된다.  내 감정을 직시하기, 그 감정에 잠겨있고 싶은지 벗어나고 싶은지 생각하기, 벗어나고 싶다면 내가 되고 싶은 상태를 떠올리기, 떠오른 상태를 만들기 위한 어떠한 행위를 하기.  이게 전부다.

편안함에 이르고 싶었다.  스토익하게 일상을 통제했다.  매일 5km 이상 뛰었고, 그것으로 부족해서 PT를 더했다.  혼술을 절대적으로 피했고, 제로콜라로 대체했다(엄청난 양의 콜라를 먹었음).  마침 산뜻해진 가을 날씨의 축복도 있고 하여, (대체로) 평온한 상태까지 무사히 이르렀다.

2024년 10월
9/29(일) 리서치 마감 → 공익사건 부채의식 조금은 덜었다.
10/1(화) 심포지움 원고 1, 2, 3 번역 마감
10/2(수) 지도교수님 미팅, 진행상황 보고
10/14(월) 18:30 고베
10/15(화) 심포지움 원고 4 번역 마감
10/19(토) 11:00 미팅
10/21(월) 笠井ゼミ 발표
10/22(화) 도쿄 출장

10/23(수) 青木ゼミ 발표(1) 
10/25(금) 기획안 마감
10/27(일) 저녁 교수님 환송회
10/31(목) 원고 마감
10/31(목) 리서치(2) 마감

2024년 11월
11/1(금) 도쿄 출장
[11/2(토)~11/4(월) ✈]
11/3(일) 8:30 10km
11/8(금) 山田ゼミ 발표(1)
11/13(수) 青木ゼミ 발표(2)
[11/14(목)~15(금) ✈, 11/15(금) 10:00~13:00 세미나]
11/16(토)~17(일) 심포지움 참석
[11/20(수)~22(금) 전체 휴강]

2024년 12월
12/6(금) 山田ゼミ 발표(2)
12/8(일) 9:15 20km
12/20(금) 山田ゼミ 종강(12/27, 1/10 수업 없음)
12/25(수) 2024년 마지막 수업
[12/26(목)~1/5(일) 전체 휴강]

2025년
1/6(월), 1/20(월) 笠井ゼミ 수업[1/20(월) 종강]
2/16(일) 42.195km
* 青木ゼミ: 10/9(수), 11/6(수) 휴강
2/25(화)~26(수) (??)

일정도 무난하게 소화중.  대부분 재택으로 소화 가능해서 좋다.  충분히 잠을 자고, 조용히 커피 내리고, 낮은 볼륨의 음악을 틀어놓고, 지겨워지면 훌쩍 뛰거나, 헬스장 다녀오거나, 조금 더 활기찬게 필요하면 테니스 치고, 배고프면 내가 먹고 싶은, 먹을 만큼의 음식을 준비해서 먹고(요리가 엄청 늘었다!!), 다시 잠드는 고요한 일상.  단풍이 천천히 물들어가듯 초 단위로 늙어가는 하루 하루가 나름 만족스럽다.  취향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때 애써 하는 무언가"로 정의한다면, 내 취향이 대체로 혼자 충만해 질 수 있는 유형의 것들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다 매일이 너무 단조로와질까봐, 아무리 과제에 잡무에 치여도 무언가 하나는 기쁘게 떠올리며 잠드는 하루를 만들려 애쓰고 있다.  집 가까이에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陶板名画の庭을 발견해서 너무 좋았고, 비오는 날 糺の森의 촉촉한 푸름에 치유되었고, 鞍馬 火祭り는 센과 치히로의 마을로 떠난 듯 경이로왔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때는 미뤄놨던 영화들을 꺼내 보는데, 몇 장면만 아카이브.

“Because I've realized that no matter where you are or what you're doing, or who you're with, I will always honestly, truly, completely love you.”
볼 때는 제법 몰입해서 봤고, 이 장면에서는 제법 설득당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뭔가 와닿는 장면은 아닌 이유는 뭘까...  이런 류의 로맨스물이 늘 그렇듯, 나중에 봤는지 안봤는지조차 헷갈릴 것 같아서 펜시브 용도로 저장.  남주 여주 비쥬얼 합이랑 영상미는 너무 좋았음.

반대로 별 감흥 없이 봤는데, 계속 생각나는 이 영화.
"처음에는 조각난 영화가 머릿 속에서 붙어지지 않았고, 영화의 메시지가 안 잡혔다.  곰곰이 생각한 후 메시지 하나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랬더니 영화가 이어 붙어져 따라 올라왔다.  신기한 경험이다."
"말하지 못한 것 말할 수 없는 것 불쑥 말해버린 것을 감싸 안는 세 번의 포옹"
"차갑게 맴도는 시간 따스히 감싸는 순간"
"영원처럼 안아줘"  

"착할게"ㅋㅋㅋㅋㅋ
"사랑을 절대 안하겠다고 다짐해라.  모든 걸 사랑하지 마라.  그래도 무언가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 널 발견하게 될걸."
"같은 길을 다른 남자와 다시 걷게 되었을 때 느꼈던 죄책감과 가벼운 흥분이 저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게 했습니다."
"넌 이뻐, 그래서 좋아." / "넌 착해, 그래서 좋아"
"많은 일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를 해주신 분들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들과 비슷한 인상의 분들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인생 속 인연의 갈라진 순간들을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동일하게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는 사랑한다는 말 뒤에 공허함이 딸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헤어질 것만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겠지만."

한참 채워놓은 머리 속을 조금 비웠더니 홀가분하다.  푹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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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리 - 숲

from 음악 2024. 9. 24. 21:32

어렵게 찾은 고요가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과분한 행복 뒤에는 어김없이 지옥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최선을 다할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만, 결국 착각 속에 머무르고 싶던 나의 욕심일 뿐.  그게 진심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었을지 반문해 보지만,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나의 이기심일 뿐.  온갖 고통에는 꽤나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겪어본 적 없는 일교차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외에 답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과 행복해지고 싶다는 평범한 소망은, 이토록 어렵다.  나에게 주어진 온갖 과분한 행운들의 반대급부이겠지만, 왜, 지금, 하필, 가장 간절한 것을 떠나 보내야 하는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버겁던 불면의 밤.  길고 힘든 밤들이었지만, 시간은 앞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므로, 어김없이 아침이 왔다.  유달리 푸르던 가을 하늘에 실려 돌아와, 5번 출구 너머 나를 맞이한 푸른 공원, 절로 미소짓게 하는 맑은 공기, 커다란 안도감, 그보다 더 큰 상실감, 허망함.

어떻게든 집안을 정리하고, 551 Horai에서 사온 슈마이로 저녁을 떼우고(놀랍게도 맛있었다....!), 5km를 천천히 뛴 후, 씻고 스피커를 켰다.  도저히 밖에서 음악을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아 자제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머리속을 맴돈 노래가 최유리의 숲이다.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난 저기 숲이 돼볼래 나의 옷이 다 눈물에 젖는대도"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

난 저기 숲이 돼볼게
너는 자그맣기만 한 언덕 위를
오르며 날 바라볼래
나의 작은 마음 한구석이어도 돼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
나는 널 들을게 이젠 말해도 돼
날 보며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난 저기 숲이 돼볼래
나의 옷이 다 눈물에 젖는대도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밀어내지 마 날 네게 둬
나는 내가 보여 난 항상 나를 봐
내가 늘 이래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나의 눈물 모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기억할게 내가 뭍에 나와있어
그때 난 숲이려나

 

홍이삭 커버.  절대 안울거라고, 눈물 흘린 후에 찾아오는 후련함에 기대지 않을 거라고 꾹꾹 누르며 다짐했지만, 결국 펑펑 ㅠㅠ

전체 영상도 너무 좋다.

"작은 언덕에만 올라도 너에게 내 작은 마음을 보일 수 있는 숲이 되고자 했다. 나를 베어서라도 눈물 바다가 되더라도 길을 터주어 너의 눈길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도 옆에는 훨씬 높은 나무가 아직 있었고. 너보다 항상 낮은 곳에 있는 내가 보였다. 깊은 눈물과 고민 끝에 이제 가장 낮은 곳에 가라앉기로 했다. 그제서야 내가 숲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을 알았다. 내 눈물은 바다 아래로 능히 감춰진다. 비로소 난 그때 뭍에 나와서 너에게 숲이 되었다."

"나는 숲이 되고 싶은 바다인가봐.  상대방에게 내 마음 속에 머물러달라고 하면서 숲이 되보겠다 했는데, 정작 '나'도 몰랐던 나의 깊은 바다ㅜㅜ 나무가 있어서 숲인 줄 알았는데, 숲이 되고 싶기에 바다 어딘가에 나무 하나가 심어져있었고 그 마저도 가라앉을까 불안한, 어떤이의 쉼이 되고 기댐이 되어줄 사람이려 했는데 '나'도 마음이 힘들었어 ㅜㅜ"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기댈 수 있게끔 그늘이 되어줄 수 있는 '숲'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많은 '바다'같은 사람이라 그렇지 못한다.  눈물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그땐 난 뭍에 나와서 숲이 될 수 있진 않을까? 그땐 당신이 내게 기댔으면 좋겠다."

아, 이 와중에도 혹시 모를 어떠한 미래를 위해 저당잡힌 현재의 굴레 속에서 회신할 메일이 산더미이다.  이럴 때 일수록 더 성의있게 더 꼼꼼하게 더 잘해야 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충분히 토로했으니 이젠 눈물을 닦고 일어나야 해, 울며 주저앉는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일도 하늘은 푸르고 맑을 거야.  언젠간 이 노래를 들어도 슬픔 대신 숲의 청량감만 번져오는 날도 올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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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9월 / 겨울잠

from 일상 2024. 9. 14. 22:31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9월이 정말이지 우당탕탕 흘러가고 있다.

그 와중에 혼자 몸을 갈아서 무사히 이사를 마친 나를 칭찬하며, 가스토에서 늦은 저녁(피자+샐러드+와인) 중.
선뜻 도움을 줄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지만, 가뜩이나 도움 요청하는걸 어려워하는 나인데 나이까지 어린 동생들이라 ㅠㅠ 차마 도와달라 하지 못했다.  이사하는 내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말을 떠올리며 크게 후회했지만, 또 막상 꾸역꾸역/우당탕탕/바타바타 해내는 건 나의 30대 그 자체 ㅠㅠ

그 사이에 잡다하게 해야 할 일이 너무 쌓여 버렸다.

~9/16(월) 스크립트 확인, 9/18(수) 미팅 이건 정말 나한테 부탁하면 안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심호흡 열 번 하고 수락했다.  상황 다 이해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  나는 이런 선배가 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다짐.
~9/18(수) 일본 법제 조사 → 실로 오래간만에 하는 공익 업무.  수 년을 가라로 하고, 급기야 막판엔 마지막 보루까지 무너져서(기부금으로 공익시간 채우기)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던 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9/20(금) 심포지엄 발제문 번역 → 가급적 18(수)까지 마무리.  내가 생각한 적정한 수준에서 접점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좋은 스타트! 그나저나 논문 보내달라는 분이 종종 계신데, 다음에는 꼭 더 잘 쓸 것을 다짐해 본다 읽을수록 부끄럽다 ㅠㅠ
~9/22(일) 일시정지 관련 외국 문헌 조사 야마다 교수님이 1:1 면담에서 자그마치 3시간이나 내주시며 모든 개별 논점을 함께 훑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 황송하고 감사했다.  함께 토의하면서 본인도 위원회 참석이 더 즐거워졌다고 말씀해 주시는 스윗함까지 ㅠㅠ 이번 생에서 인복은 어딜 가도 패시브로 따라오는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하고 보답하고 싶음!
~9/23(월) 면담 → 이것도 솔직히 선 넘었지 ㅠㅠ..........................................
~9/30(월) MBE Lecture 끝, 9월 초까지 overachieve하면서 흐름 좋았는데 끊어져서 아쉽.  Contracts랑 Tort는 비교적 수월했고 Criminal Law도 그냥저냥 할만하다고 느낌.  왠지 남은 과목들이 다 헬일 것만 같다.  시험 일정은 remote 응시 가능하면 내년 2월, 불가능하면 내년 7월로 확정
~2학기 일정 관련 교수님 면담 / 재택 연수 관련 N사무소 협의.  조건은 상관없으니 업무량이 적정하길 ㅠㅠ

사실 의도적으로 일을 벌린 부분도 있다.  어떤 방면에서든 결핍이 생기면 나를 채찍질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방법 외에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계속 바쁘게 몰아치면서 특정 감정에 잠길 여유를 주지 않는 것 외에 어떤 수가 있을까.

그러다가 텐가차야까지 소파 전자렌지 받으러 편도 80km를 운전하던 중 흘러나온 노래에 또르르.. 아이유 조각집 앨범 진짜 들을수록 좋다. 

 

때 이른 봄 몇 송이 꺾어다
너의 방 문 앞에 두었어
긴 잠 실컷 자고 나오면
그때쯤엔 예쁘게 피어 있겠다

별 띄운 여름 한 컵 따라다
너의 머리맡에 두었어
금세 다 녹아버릴 텐데
너는 아직 혼자 쉬고 싶은가 봐

너 없이 보는 첫 봄이 여름이
괜히 왜 이렇게 예쁘니
다 가기 전에 널 보여줘야 하는데
음 꼭 봐야 하는데

내게 기대어 조각잠을 자던
그 모습 그대로 잠들었구나
무슨 꿈을 꾸니
깨어나면 이야기해 줄 거지
언제나의 아침처럼 음

빼곡한 가을 한 장 접어다
너의 우체통에 넣었어
가장 좋았던 문장 아래 밑줄 그어
나 만나면 읽어줄래

새하얀 겨울 한 숨 속에다
나의 혼잣말을 담았어
줄곧 잘 참아내다가도
가끔은 철없이 보고 싶어

새삼 차가운 연말의 공기가
뼈 틈 사이사이 시려와
움츠려 있을 너의 그 마른 어깨를
꼭 안아줘야 하는데

내게 기대어 조각잠을 자던
그 모습 그대로 잠들었구나
무슨 꿈을 꾸니
깨어나면 이야기해 줄 거지
언제나의 아침처럼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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