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입안을 베어낼 정도의 고통을 감당하며 쓴잔을 마시려는 이유는 뭘까.
시집 1장 ‘사랑의 전문가’ 머리에 인용한 영국 비평가 존 버거(1926~2017) 말에 답이 든 듯하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해줄 말들을 찾고 있어요.”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는 철학을 말하면 ‘우리가 참 아름다운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그 고통받는 사람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리잖아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고통받는 사람은 잊히지 않아요. ‘내가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다 도와야 해’ 이렇게 생각하면, ‘아니 내가 예수님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고통에는 진지해질 수 있잖아요. 전능한 존재라서 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그거라도 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고통 받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어떤 일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던 시간들을 거쳐 이 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적어도 진은영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는"을 네 번 반복하면서 시의 구조적 긴장을 붙드는 동안,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 성찰을 속성열거법의 형식으로 전개한다.  예컨대 그것은 절망을 재료로 삼을 때가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 행위이고, 때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이며, 시를 쓰는 이와 자신을 화해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동시대의 현실에 밀착하는 증언자일 때도 있으며, 죽어가는 이의 곁을 무릎 모아 지키는 성실한 입회자이고, 끝나지 않는 애도의 표상이기도 하고.. 등이다.  정말 인생은 아름답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좋은 시에는 둘 다 있다.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팽팽한 경쟁의 감미로움과 함께."

"사랑과 저항은 하나이고 사랑과 치유도 하나라고 이 시집 전체가 작게 말하고 있을 뿐, 어떤 시도 직접적으로 크게 말하고 있진 않다. (중략) 진은영의 정련된 이미지들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유와 감정이 들끓고 있는가. 더 중요한 것은 사유와 감정이 하나의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진은영은 "좋은 시인은 잘 싸우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분쟁으로 가득한 장소"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이토록 아름다워지는데 성공한다.  브레히트는 어디선가 "아름다움이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은 분쟁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돌파일까, 아니면 해결되었다고 믿게 하는 유혹일까.  브레히트의 말이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인지 냉소인지 오랫동안 헷갈렸는데, 정혜신의 다음 말은 그 답을 비스듬하게 알려준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곡 치유적 자극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 (신형철, 해설「사랑과 하나인 것들: 저항, 치유, 예술」중)

,

고요한 10월

from 일상 2024. 10. 26. 23:39

감정은 호르몬의 산물이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다른 호르몬을 생성하면 된다.  내 감정을 직시하기, 그 감정에 잠겨있고 싶은지 벗어나고 싶은지 생각하기, 벗어나고 싶다면 내가 되고 싶은 상태를 떠올리기, 떠오른 상태를 만들기 위한 어떠한 행위를 하기.  이게 전부다.

편안함에 이르고 싶었다.  스토익하게 일상을 통제했다.  매일 5km 이상 뛰었고, 그것으로 부족해서 PT를 더했다.  혼술을 절대적으로 피했고, 제로콜라로 대체했다(엄청난 양의 콜라를 먹었음).  마침 산뜻해진 가을 날씨의 축복도 있고 하여, (대체로) 평온한 상태까지 무사히 이르렀다.

2024년 10월
9/29(일) 리서치 마감 → 공익사건 부채의식 조금은 덜었다.
10/1(화) 심포지움 원고 1, 2, 3 번역 마감
10/2(수) 지도교수님 미팅, 진행상황 보고
10/14(월) 18:30 고베
10/15(화) 심포지움 원고 4 번역 마감
10/19(토) 11:00 미팅
10/21(월) 笠井ゼミ 발표
10/22(화) 도쿄 출장

10/23(수) 青木ゼミ 발표(1) 
10/25(금) 기획안 마감
10/27(일) 저녁 교수님 환송회
10/31(목) 원고 마감
10/31(목) 리서치(2) 마감

2024년 11월
11/1(금) 도쿄 출장
[11/2(토)~11/4(월) ✈]
11/3(일) 8:30 10km
11/8(금) 山田ゼミ 발표(1)
11/13(수) 青木ゼミ 발표(2)
[11/14(목)~15(금) ✈, 11/15(금) 10:00~13:00 세미나]
11/16(토)~17(일) 심포지움 참석
[11/20(수)~22(금) 전체 휴강]

2024년 12월
12/6(금) 山田ゼミ 발표(2)
12/8(일) 9:15 20km
12/20(금) 山田ゼミ 종강(12/27, 1/10 수업 없음)
12/25(수) 2024년 마지막 수업
[12/26(목)~1/5(일) 전체 휴강]

2025년
1/6(월), 1/20(월) 笠井ゼミ 수업[1/20(월) 종강]
2/16(일) 42.195km
* 青木ゼミ: 10/9(수), 11/6(수) 휴강
2/25(화)~26(수) (??)

일정도 무난하게 소화중.  대부분 재택으로 소화 가능해서 좋다.  충분히 잠을 자고, 조용히 커피 내리고, 낮은 볼륨의 음악을 틀어놓고, 지겨워지면 훌쩍 뛰거나, 헬스장 다녀오거나, 조금 더 활기찬게 필요하면 테니스 치고, 배고프면 내가 먹고 싶은, 먹을 만큼의 음식을 준비해서 먹고(요리가 엄청 늘었다!!), 다시 잠드는 고요한 일상.  단풍이 천천히 물들어가듯 초 단위로 늙어가는 하루 하루가 나름 만족스럽다.  취향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때 애써 하는 무언가"로 정의한다면, 내 취향이 대체로 혼자 충만해 질 수 있는 유형의 것들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다 매일이 너무 단조로와질까봐, 아무리 과제에 잡무에 치여도 무언가 하나는 기쁘게 떠올리며 잠드는 하루를 만들려 애쓰고 있다.  집 가까이에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陶板名画の庭을 발견해서 너무 좋았고, 비오는 날 糺の森의 촉촉한 푸름에 치유되었고, 鞍馬 火祭り는 센과 치히로의 마을로 떠난 듯 경이로왔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때는 미뤄놨던 영화들을 꺼내 보는데, 몇 장면만 아카이브.

“Because I've realized that no matter where you are or what you're doing, or who you're with, I will always honestly, truly, completely love you.”
볼 때는 제법 몰입해서 봤고, 이 장면에서는 제법 설득당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뭔가 와닿는 장면은 아닌 이유는 뭘까...  이런 류의 로맨스물이 늘 그렇듯, 나중에 봤는지 안봤는지조차 헷갈릴 것 같아서 펜시브 용도로 저장.  남주 여주 비쥬얼 합이랑 영상미는 너무 좋았음.

반대로 별 감흥 없이 봤는데, 계속 생각나는 이 영화.
"처음에는 조각난 영화가 머릿 속에서 붙어지지 않았고, 영화의 메시지가 안 잡혔다.  곰곰이 생각한 후 메시지 하나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랬더니 영화가 이어 붙어져 따라 올라왔다.  신기한 경험이다."
"말하지 못한 것 말할 수 없는 것 불쑥 말해버린 것을 감싸 안는 세 번의 포옹"
"차갑게 맴도는 시간 따스히 감싸는 순간"
"영원처럼 안아줘"  

"착할게"ㅋㅋㅋㅋㅋ
"사랑을 절대 안하겠다고 다짐해라.  모든 걸 사랑하지 마라.  그래도 무언가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 널 발견하게 될걸."
"같은 길을 다른 남자와 다시 걷게 되었을 때 느꼈던 죄책감과 가벼운 흥분이 저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게 했습니다."
"넌 이뻐, 그래서 좋아." / "넌 착해, 그래서 좋아"
"많은 일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를 해주신 분들은 최대한 원래 모델이 된 분들과 비슷한 인상의 분들을 선택했습니다.  그 비슷함이란 한계 때문에 제가 보고 싶었던 붙여놓은 그림의 효과를 절감시킬 것 같습니다."
"인생 속 인연의 갈라진 순간들을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동일하게 경험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는 사랑한다는 말 뒤에 공허함이 딸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헤어질 것만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겠지만."

한참 채워놓은 머리 속을 조금 비웠더니 홀가분하다.  푹 자야지.

,

최유리 - 숲

from 음악 2024. 9. 24. 21:32

어렵게 찾은 고요가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과분한 행복 뒤에는 어김없이 지옥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최선을 다할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만, 결국 착각 속에 머무르고 싶던 나의 욕심일 뿐.  그게 진심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었을지 반문해 보지만,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나의 이기심일 뿐.  온갖 고통에는 꽤나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겪어본 적 없는 일교차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외에 답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과 행복해지고 싶다는 평범한 소망은, 이토록 어렵다.  나에게 주어진 온갖 과분한 행운들의 반대급부이겠지만, 왜, 지금, 하필, 가장 간절한 것을 떠나 보내야 하는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버겁던 불면의 밤.  길고 힘든 밤들이었지만, 시간은 앞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므로, 어김없이 아침이 왔다.  유달리 푸르던 가을 하늘에 실려 돌아와, 5번 출구 너머 나를 맞이한 푸른 공원, 절로 미소짓게 하는 맑은 공기, 커다란 안도감, 그보다 더 큰 상실감, 허망함.

어떻게든 집안을 정리하고, 551 Horai에서 사온 슈마이로 저녁을 떼우고(놀랍게도 맛있었다....!), 5km를 천천히 뛴 후, 씻고 스피커를 켰다.  도저히 밖에서 음악을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아 자제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머리속을 맴돈 노래가 최유리의 숲이다.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난 저기 숲이 돼볼래 나의 옷이 다 눈물에 젖는대도"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

난 저기 숲이 돼볼게
너는 자그맣기만 한 언덕 위를
오르며 날 바라볼래
나의 작은 마음 한구석이어도 돼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
나는 널 들을게 이젠 말해도 돼
날 보며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난 저기 숲이 돼볼래
나의 옷이 다 눈물에 젖는대도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밀어내지 마 날 네게 둬
나는 내가 보여 난 항상 나를 봐
내가 늘 이래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나의 눈물 모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기억할게 내가 뭍에 나와있어
그때 난 숲이려나

 

홍이삭 커버.  절대 안울거라고, 눈물 흘린 후에 찾아오는 후련함에 기대지 않을 거라고 꾹꾹 누르며 다짐했지만, 결국 펑펑 ㅠㅠ

전체 영상도 너무 좋다.

"작은 언덕에만 올라도 너에게 내 작은 마음을 보일 수 있는 숲이 되고자 했다. 나를 베어서라도 눈물 바다가 되더라도 길을 터주어 너의 눈길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도 옆에는 훨씬 높은 나무가 아직 있었고. 너보다 항상 낮은 곳에 있는 내가 보였다. 깊은 눈물과 고민 끝에 이제 가장 낮은 곳에 가라앉기로 했다. 그제서야 내가 숲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을 알았다. 내 눈물은 바다 아래로 능히 감춰진다. 비로소 난 그때 뭍에 나와서 너에게 숲이 되었다."

"나는 숲이 되고 싶은 바다인가봐.  상대방에게 내 마음 속에 머물러달라고 하면서 숲이 되보겠다 했는데, 정작 '나'도 몰랐던 나의 깊은 바다ㅜㅜ 나무가 있어서 숲인 줄 알았는데, 숲이 되고 싶기에 바다 어딘가에 나무 하나가 심어져있었고 그 마저도 가라앉을까 불안한, 어떤이의 쉼이 되고 기댐이 되어줄 사람이려 했는데 '나'도 마음이 힘들었어 ㅜㅜ"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기댈 수 있게끔 그늘이 되어줄 수 있는 '숲'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많은 '바다'같은 사람이라 그렇지 못한다.  눈물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그땐 난 뭍에 나와서 숲이 될 수 있진 않을까? 그땐 당신이 내게 기댔으면 좋겠다."

아, 이 와중에도 혹시 모를 어떠한 미래를 위해 저당잡힌 현재의 굴레 속에서 회신할 메일이 산더미이다.  이럴 때 일수록 더 성의있게 더 꼼꼼하게 더 잘해야 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충분히 토로했으니 이젠 눈물을 닦고 일어나야 해, 울며 주저앉는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일도 하늘은 푸르고 맑을 거야.  언젠간 이 노래를 들어도 슬픔 대신 숲의 청량감만 번져오는 날도 올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