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삶

from 일상 2013. 3. 25. 20:21

군대에서 가장 말단 세포 조직에 해당하는 일개 병으로 군생활을 하다 보면, 역사를 통틀어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전세계 많은 병사들의 면면을 떠올리게 된다. 세력의 충돌로 요약되는 거시적인 전쟁사에 그들 개개인의 삶과 감정,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겠지만,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비슷한 곳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조선시대에도 군역은 존재했고, 그 이전에도, 까마득한 과거에도 군대 혹은 그 유사한 합법적(?) 무력 행사 기구는 존재했다. 심지어 불과 60년 전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국민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그 흐름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는, 이와 대동소이한 우리의 군생활도 훗날 역사책 한켠의 '2000년대 대한민국의 징병제도'라는 카데고리 안에서 다뤄질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 병사 개개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내 군생활도 반복되는 경제 주기마냥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국가 간의 알력 속에 자세력의 체제 유지용 국방(?)의 일부를 구성하는 이름 없는 하나의 점 정도, 로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튼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던 과거와 달리, 집단에 예속되어 규칙적인 삶을 살며 느낀점은 '개인의 삶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학업과, 사랑과, 가정과, 우정을 가꾸고 키우는 텃밭은 언제든지 총성과 포탄 속에 불바다가 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내가 그 목적과 상황에 동의하지 않고 동참을 거부하려 한다 해도 나에게는 그러할 권리가 없다. 어쩌면 내가 사회에서 누리던 선택의 자유가 전체 인류사를 통틀어 '비정상적으로' 많이 주어진 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편린으로서의 우리는 그 시대의 물결이 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굳이 전쟁과 군대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생활과 문화만 해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시대에 중국어를 배웠듯 우리는 현재 최강국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고, 서당에서 한글이 아닌 한문을 가르쳤듯 영어유치원과 조기유학이 성행하고 있으며, 불과 수십년만에 의상, 식문화, 유흥 문화 등 모든 것이 서구화(미국화) 되었다. 텝스 책을 붙잡고 씨름하는 나의 모습이 사서삼경을 읽던 나의 조상님의 모습과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던 과거의 모습이나, (세력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진보된 사회의 양상에 따라서 형식적 평등을 전제로 규정된) 한미 동맹 관계에 따라 미국에 안보 및 국가 체제 유지를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재나 형식상의 차이나 존재할 뿐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이건 누구의 바램,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고 우리에겐 그 상황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시대의 요구 앞에 무기력하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삶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한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개개인을 구분짓고 차이를 발생시키는 부분은 이 작은 부분의 합이 아닐까. 시대가 규정짓는 거대한 가치에 휘말려 허황된 꿈을 좆는 것 보다는, 치밀하게 구성된 거대한 흐름을 하나의 현실, 내 삶의 전제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되, 내가 바꿔나갈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부분에서 나의 행복과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한 힘들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약간의 변화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은, 무기력하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나의 공간에 충실하고 그곳에 나의 색깔을 입혀 나갈 때, 그리고 그러한 점을 모두가 자각하고 조금씩 무언가 이루어 나갈 때 비로소 개인은 사회의 흐름에서 해방되어 하나의 주체적인 자아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반복되는 삶 속의 아주 잠시일지라도, 부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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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변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략)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저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중략) eni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중략) 그녀가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중략)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 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략) 첫 번재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 그는 책 속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적인 삶, 다른 남자들 혹은 여자들과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접촉, 그들의 환호 소리를 희구했다.
그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도서관에 고립된 연구 생활)이 그의 현실이며,
그가 현실이라고 간주했던 시위 행렬은 하나의 볼거리, 춤, 축제,
달리 말하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 (중략)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중략)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여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중략)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히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중략)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의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중략)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 (중략)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에요!"


-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벌주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 다음도 도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써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기를 바랬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하는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하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 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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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I feel like I don't have a partner 
Sometimes I feel like my only friend 
Is the city I live in, the city of angels 
Lonely as I am, together we cry 

I drive on her streets cause she's my companion 
I walk through her hills cause she knows who I am 
She sees my good deeds and she kisses me windy 
I never worry, now that is a lie. 

Well, I don't ever want to feel like I did that day 
Take me to the place I love, take me all the way 
I don't ever want to feel like I did that day 
Take me to the place I love, take me all the way, yeah, yeah, yeah 

It's hard to believe that there's nobody out there 
It's hard to believe that I'm all alone 
At least I have her love, the city she loves me 
Lonely as I am, together we cry 

Well, I don't ever want to feel like I did that day 
Take me to the place I love, take me all the way 
Well, I don't ever want to feel like I did that day 
Take me to the place I love, take me all the way, yeah, yeah, yeah 
oh no, no, no, yeah, yeah 
love me, i say, yeah yeah 

(under the bridge downtown) 
(is where I drew some blood) 
is where I drew some blood 

(under the bridge downtown) 
(I could not get enough) 
I could not get enough 

(under the bridge downtown) 
(forgot about my love) 
forgot about my love 

(under the bridge downtown) 
(I gave my live away) 
I gave my life away yeah, yeah yeah 

(away) 
no, no, no, yeah, yeah 

(away) 
no, no, I say, yeah, yeah 

(away) 
here I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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