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단순하게 보면 '화려한' 사랑과 전쟁, 예쁘게 포장한 불륜 이야기 정도?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데이지 나쁜x' 정도에서 끝날 가능성이 크다.

- 하지만 개츠비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감정이입하여 보면 144분이란 런닝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가난과 무능력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 못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력가가 되는 개츠비의 모습, 그녀를 위한 순정의 상징인 호수 맞은편 저택, 파티의 화려함 속에 숨겨진 외로움, 기약없는 그녀와의 재회에 대한 남모를 염원, 애틋한 재회, 무서운 집념, 뼈아픈 배신에 이르기까지...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잘 버무려져 있다. 너무나 무서울정도로 강렬한 사랑이었기에, 그 에너지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그의 인간적인 모습.. 속은 곪을 데로 곪아 터졌는데도 마지막까지 그녀를 믿어보려 애쓰는 그의 순애보가 애잔했고, 자아부정과 자기파괴에 이르기까지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모든 것을 바치는 개츠비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이 갔다. 사랑의 절대성이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수단화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하여 무너져버리는 과정... 

자신을 내놓지 않은 채 사랑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진심, 에너지, 삶을 내놓는 고단하고도 헌신적인 감정이 사랑이 아닌가. 결코 등가적 거래의 형식으로 성립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에 항상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아프고 힘겹고 무너지고는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아니할 수 없기에' '그게 아니면 살수가 없어서' '자신이 그걸 가지지 못하면 정말 전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알면서도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형태와 결말은 어찌되었던 간에, '불륜'이라는 단어로 정의되기에는 개츠비의 감정이 너무나 '진실한 사랑'으로 보여 혼란스러웠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을 빙자하여 유부남의 여자를 빼앗'는 다는 문장으로 요약하기에는 흔들리는 개츠비의 눈빛이 너무나 진실되다.

그렇기에 타인에 손에 의해 죽는 그의 최후를 보며 오히려 안도가 될 정도였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사는 것보다는 사랑했던 기억만 가지고 죽는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개츠비의 장례식은 외로웠지만 파티에 모인 군중이 개츠비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듯,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어도 어차피 개츠비는 외로웠을 것이다. 데이지가 오지 않았기에.

이러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와중에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사회 문제도 불편하지 않게 녹아있고, 전체적으로 원작의 분위기와 사소한 심리 변화를 최대한 재현하고자 신경쓴 부분이 칭찬할 만 하다.

- 영상미랑 OST가 훌륭하다. 영화 초반의 대부분을 파티씬이 차지하는데,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기분이었음.


요까지는 영화 감상. 13. 05. 16  ===========================================


감명깊게 봤던 위대한 개츠비를 책으로 다시 봤다. 

보통 영화를 보고 원작 도서를 접하면 영화 각색 과정에서 떨궈져 나간 은유, 부실한 스토리 등으로 분개하기 마련인데,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에는 영화화가 훌륭하게 된 편인 것 같다. 책으로 오는 감동도 컸지만 영화를 보고 그 이미지가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힌 것 같다. 

초반에 개츠비가 등장하기까지 인물들이 다소 산만하게 등장하고 몰입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는데, 영화의 기억을 통해서 이를 보충/상상해가며 보니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ㅎㅎ


p.139

 작별 인사를 하러 개츠비에게 갔을 때 그의 얼굴에는 다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의심이 생긴 듯한 표정이었다. 5년이 가까운 세월! 심지어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가 품어온 환상의 거대한 힘 때문에 말이다.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을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온갖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 


- one-side한 감정이 지속되다 보면, 그리고 그 감정에 너무 몰입되고 무조건적으로 이를 키워나가다 보면, 실체를 기반으로 한 그 감정은 결국 실체와는 완전히 무관한 어떤 환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드물게 환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도 그 대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있지.


p.159

 "나 같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반복할 수 있고 말고요!"

(중략) "난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 (후략)

 그는 그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가 되돌리고 싶은 것이 데이지를 사랑하는데 들어간, 그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했지만, 만약 다시 한 번 출발점으로 돌아가 천천히 모든 것을 다시 음미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p.193

 인간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 우리는 그들의 비극적인 말다툼이 도시의 불빛을 뒤로 한 채 스러져 가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른 살 - 고독의 10년을 기약하는 나이, 독신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나이, 야심이라는 서류 가방도 점점 얄팍해지는 나이, 머리카락도 점점 줄어드는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내 옆에는 데이지와는 달리 깨끗이 잊힌 꿈을 해를 묵혀 가며 간직하기에는 너무 똑똑한 여자인 조던이 앉아 있었다. (중략)
 그래서 우리는 점차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황혼을 뚫고 죽음을 향해 계속 차를 몰았다.


p.253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매혹적인 한순간에 인간은 이 대륙을 바라보며 틀림없이 숨을 죽이고 잇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심미적 관조에 어쩔 수 없이 빠져 버린 채 인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는 재능과 맞먹는 그 무엇과 직면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곳에 앉아 그 오랜 미지의 세계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너머 광막하고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 -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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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츠지 히토나리의 책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냉정과 열정 사이 Blue'를 연달아 읽게 되었다. 남녀 작가가 주고받으며 쓴 책의 '남자' 입장만 주구장창 읽은 셈이다.


두 권 다 낯이 익다. 하지만 스물한두살 때, '현재'를 살아가며 아오이를 사랑하던 준세이와 서른 즈음이 되어 '과거'에 사로잡힌 준세이가 같을 수 없듯,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8년이란 세월의 계곡은 얼마나 깊고도 험한가.


하여튼 두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냉정과 열정 사이 blue'의 아류작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일 우호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의뢰 때문에 쓴 작위적인(?) 작품이라 그런지, 소재가 고갈된 건지. 유사한 부분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거의 자기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1) 남녀가 각각 1인칭 시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술 방식

 동일한 주제로 시점을 달리해서 남/녀 작가가 소설을 내는 것은 '지금은' 흔해진 상황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출간 당시에는 이러한 방식이 실험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작품의 성공 이후에는 여러 작가게 의해 차용되어 흔해진 방법이다.

 단순히 남/녀 작가가 연인 관계에 대입되어 다른 책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 내에서 두 주인공이 같은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시점만 달리해서 서술하는 방법(무라카미 하루키 - IQ84), 주제와 문제의식만 공유하되 서로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정이현, 알랭 드 보통 - 연인들)까지 해서, 점점 다양한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것 같다. 여튼 주고 받는 서술 방식이 처음엔 참 신선했는데 이제는 흐음.. 하는 느낌


 2) 과거를 품고 살아가는 남자주인공

 둘 다 20대 초반에 겪은 뜨거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랑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정하고 이별 후에도 지속적으로 마음을 키워 간다는 점도 동일하다. 답답하고 바보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랑도 있는 거니까.


 3) 매력적이지만 온전히 사랑 할 수 없는 여자친구

  주인공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날 의지도 없기에(오히려 지나간 사랑에 몰입하여 절대적 가치와 신화를 부여하는 과정을 겪고, 이로 인해 그 감정과 대상은 대체가능성 없는, 공략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필연적으로 현 여자친구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둘 다 매력적인 이성으로 묘사되면서도 과거를 뛰어넘기는 불충분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도 '과거'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 여자친구는 ~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 는 이랬다' 는 독백이 이어진다. 

 그러한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비참해져가는 여자의 모습도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언어와 신체를 총동원하여 애원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여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한없이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나쁜 주인공.. 하지만 이런 나쁜 남자의 속을 들여다보면 찌질한 집착남이 보인다는 아이러니. 지고지순한 사랑은 '유일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관계는 거짓과 위선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관계의 파멸은 예고된 수순이라.


 4) 모성애의 결핍, 무능력/부도덕한 아버지

 주인공이 헤어날 수 없는 '과거'를 사는 것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지난 감정에 대한 회한과 감상은 짙어지게 되어 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은 부모의 부재 / 없느니만 못한 부모의 존재로 인하여 한층 더 고독 속에 휩싸이게 된다. 조연급 인물로 주인공이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 나오기는 하나, '부모'의 존재와 대비되어 오히려 주인공의 딱한 처지를 부각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5) 막연한 약속 또는 우연한 재회까지..

 10년 뒤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요.
 내가 너와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언젠가 너도 그 책읽고 내 맘을 알아주겠지.

 막연하다. 우연함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성'을 쌓는 과정이라 보는게 맞지 않을까. 각자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


6) 주인공을 그리워하는 상대방과 어중간한 결말

 두 작품 다 결말이 어중간하다. 매력적인 남자에게 청혼을 받은 베니, 새로운 남자친구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한 아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주인공과의 재회를 피하지 않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인공을 희망고문시킨다. 먼 두오모까지 발을 옮기거나, 생일선물을 주며 재회한 그들은 몸과 마음을 나누며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수년의 세월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대답은 회피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현실감각 있는 독자라면 열정이 냉정을 이기기 쉽지 않겠다, 는 결말 또한 예상할 수 있으르 것이다.


7) 시간적 거리와 '기억'의 힘

 주인공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랑의 끈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은, '수년이 경과한 후'에도 약속 또는 생일을 잊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상대방의 '기억'에 있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거을 추정 가능하게 해준다. 그 세월을, 추억들을 잊지 않았으며, (형태와 강도는 변했을지망정) 나에 대한 호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나에게 그랬듯 너에게도 내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재회.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는 감정들의 향연에 재회 후 주인공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기쁘되 버거워한다.


+) 냉정과 열정사이 여주인공 이름은 '아오이=blue'. 사랑 후에 오는 것을 여주인공 이름은 '홍=베니=red'
   아.. 너무 작위적인 대비 아닌지. 
   또 왜 '인수'는 여자입니까. 작가님 작명센스좀!

+) 배경이 되는 국가의 예술적 요소가 개입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보티첼리 등 미술이,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부각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보티첼리 등의 미술이,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부각된다.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지식은 나부터가 얕아서 이렇다 저렇다 평을 못내리겠지만, 자주 인용되는 윤동주의 시는 어딘가 어색해!!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해서 녹여냈다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끼워맞쳤다는 인상을 주는 어색한 인용이 몇군데 있다.

+) 이노가시라 공원, 키치죠지, 우메가오카, 오기쿠보, 미타카.. 이런 지명이 너무 나쯔까시이!!
JR 노란거 타고 덜컹거리면서 기차여행 떠나면 너무 좋겠다... 내년에 가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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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다소 기대 이하였고, '냉정과 열정 사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스물 여섯 지금 여기의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문구들을 추려 봅니다.


# 잊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지금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이 거리의 푸르고 투명한 하늘처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략) 아오이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들고, 실제로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기억의 심술이다. 여기가 마침 시간이 정지해 버린 거리여서 그런지, 나는 어딘지 모르게 과거에 흔들리는 나 자신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 아오이를 일상에서 쫓아 내지 못하는 한, 매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고양이같은 그녀에게 화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상대를 옭아매고 싶지 않으니까, 하고 얼버무린다.
 결국 아오이가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난 아직 아오이를 가슴 속에서 내몰아버릴 정도의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나는 과거를 쫓아가도 좋은 건지, 또한 미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약속, 그 주술적인 올가미에 묶여 있는 내 자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가 기다리고 있다. 서른 살 생일, 5월 25일..

# 메미의 요구로 그녀를 품에 안았고, 마음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남자라는 동물은 이렇게 허망하다.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안을 수도 있기에. 그것은 반쯤은 동정에 의하나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메미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관계를 마칠 때 마다 후회하지만, 오늘이라는 날을 어떻게든 지내고 보자는 게으르고 자포자기적인 성격 탓에 나는 일순의 쾌락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사무적인 행위라는 것을 메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메미는 집요하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나에게 안긱는 것 외에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서로를 안는 것이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라도 한 것 처럼.

# 메미는 울먹이며 그러너 말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다시 문이 닫히고 방 안은 어두워졌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복원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복원시켜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찢어진 그림을 어떻게 복원시켜야 할까. 바니스를 칠해야 할까, 판화의 뒷면을 조사해야 할까, 아니면 벌레 구멍을 막아야 할까. 먼저 액자를 바꿔야 할까, 아니면 접착을 다시 해야 할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격심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올 뿐이었다.

# (전략) 이상하게도 오히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아오이와의 추억을 평생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자는 결의가 생기는 것이었다. 아오이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 며칠 전, 인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건 불행한 일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지만, 몇 번이라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 수 있다. 자신의 새로운 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기다리는 시간. 그것은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기다림의 저 앞에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은 8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 눈 앞에 꿈에도 잊지 못한 아오이의 검고 아름다운 눈이 있었다. 감정의 둑이 터지면서 한숨이 밀려 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비로소 지금이라는 현실을 보려 하고 있다. 눈 앞에 있는 아오이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눈앞의 아오이는 미래다. 그런 생각과 함께 행복과 불안이 내 몸 안에서 격렬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 아오이의 생각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이가 그 허망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경이로웠지만, 내가 8년이나 기다려 온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 또한 경이였다. 이런 기적이 일어났기에, 우리 두 사람은 보다 강렬한 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만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아오이의 눈이 아름답게 느껴지면 질수록, 내 마음은 갈 곳 몰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도대체 무어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안고 있는 것은 8년 전의 아오이였다. 아오이도 필시 8년 전의 나를 안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와 잔 것이다. 1초라도 빨리,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계곡을 메우고 싶었다. 임시로라도 다리 하나 놓고 싶었다. 그러나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험했다.

# 눈앞에 있는 아오이가 8년 전의 아오이와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데 고작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몸도 옛날과 다름없었지만, 거기에는 뭔가가 빠져 있었다. 어딘가 구멍이 뚫리고 틈이 생긴 것 같았다. 바로 그것을, 복원사인 내가 찾아내어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를 신중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다.

# 약속만을 유일한 삶의 의미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과거만을 짊어지고 살아온 나 자신에게, 이제 와서 신은 무엇을 새로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 이 순간, 과거도 현재로 미래도 퇴색하고 현재만이 빛을 발한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일순간이며, 그것은 열정이 부딪쳐 일으키는 스파크 그 자체이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현재는 점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때렸다... 나는 과거를 되살리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를 울러펴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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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 5년 동안 함께해줘 고마웠다. 굉장한 경험이었다. ‘일상사’ 연구라는 당신의 방법론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좋겠다. 

뤼트케 = WCU에 초청해줘 감사한다. 생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한양대에 와서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와 유럽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과 고민이 대등하게 만나는 비교문화연구소 같은 국제적인 연구소가 있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구 협력 모델을 이어가면 좋겠다. 나의 일상사 연구에 관해 이야기하면, 박사논문이자 첫번째 프로젝트는 프로이센(독일) 경찰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법이나 규율이 상층부뿐만 아니라 하층부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평범한 경찰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보통 경찰에 관한 문서를 찾는 게 어려웠다. 경찰 정책에 관한 것들은 나와 있지만, 실제 경찰들의 한 일이나 기능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낮은 지위의 경찰은 높은 지위에 있는 경찰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위의 권력자들이 만든 자료만 보면, 어느 사회든 체제의 정치권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실천은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들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예컨대 각급 학교에서 부상의 우려 때문에 매년 눈싸움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말은 곧 아이들이 그 지시를 무시하고 매년 눈싸움을 했다는 말이다. 일상사 연구의 핵심 중 하나는 잘 안 보이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권력과 보통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임지현 = 일상사와 전통적인 마르크스에 입각한 역사연구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뤼트케 =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도 국가의 지배나 지배도구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심이다. 에드워드 톰슨이 1963년에 출간한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창비)을 보면, 공장이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간 같은 규율을 엄격하게 강요했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그런데 당시 노동자들의 일상사를 보면, 정시 출근을 하는 등 겉으로는 시간 규율대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근 15분만에 독자적으로 쉬면서 차를 마시곤 했다. 19세기 프러시아 같은 경찰국가나 노동 규율이 강한 곳은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노동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나가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도 했다. 회색 지대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이런 일상사는 산업화, 근대화에 들어간 사람들과 구조를 분석하는 역사학 쪽에서 잘 논의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많은데, 진짜 일상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사는 역사학보다는 사회인류학, 문화인류학쪽과 가깝다. 일상사 연구는 미국에서 먼저 발전한 이들 인류학 연구자들과의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류학 연구로부터 통찰력을 얻는 게 중요했다. 최근 막스 플랑크연구소의 역사인류학 연구소에서 인류학 등의 도움을 통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읽어내려는 연구를 하고 있다. 

임지현 = 지금 이야기는 북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보면, 뤼트케 교수가 예로 든 서구의 노동자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에 담배도 몰래 태우곤 하는 우리말로 ‘땡땡이’ 치는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의 이미지는 독재자에게 완전히 장악된 전체주의 사회인데, 일상을 보면 독재 체제에서 규율·명령에 따라 엄청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상과는 다른 현실의 노동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규제나 통제가 100% 실현되는 사회는 독재자의 꿈이지만 그 꿈은 노동자들에 의해 늘 배반될 수밖에 없는 꿈이다. 

뤼트케 =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독일의 나치 시대에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나치 집권에 반대하고, 투쟁도 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나치의 집권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되거나 심지어 적극 협력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일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나치는 영악하게 여러 일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원래 무급휴가였던 메이데이(노동절)를 유급휴가로 바꿔줬다. 히틀러가 ‘기쁨을 통한 힘’이라고 부른 일종의 나치적 복지정책을 통해 광범위하게 실시되는데, 국민차(폴크스바겐) 보급 프로젝트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막 결혼한 사람들에겐 인센티브도 줬다. 

흔히 억압을 당해서 나치즘에 동원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일상의 사람들에겐 가정을 만들고 이루어나가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그래서 결국 반대한 사람도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동조하게 됐다. 나치 식의 전쟁 동원 방식이 작동된 것이다. 많은 병사들에게 전쟁은 폭력이지만 동시에 점령 국가로 해외 여행을 가는 기회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아랫 사람이었던 많은 평범한 독일 사람들에게 현지인들을 하인부리듯 하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독일 사람들에겐 이같은 매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독재체제의 대중동원이 꼭 대중을 속여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임지현 = 박정희 독재 정권도 독일의 국민차 프로젝트와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퍼블릭카’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력으로는 무리였다. ‘마이카’는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가서 실현됐다. 경부고속도로 또한 ‘아우토반’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점을 늘 강조했다. 왕족이란 자부심이 강했던 이승만과는 가장 큰 차이였다. 빈농의 출신 배경을 볼모로 조국근대화, 국민차, 고속도로 같은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대중의 자발적 동원을 유도했다. 대중이 박정희를 지지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의 지지가 가진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그 바탕 위에서 그 체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대중독재’ 프로젝트 연구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데 알프의 일상사 방법론은 중요한 영감이 됐다. 

그리고 뤼트케 교수도 알겠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다. 그의 당선과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담론의 층위들은 한국 사회에서 ‘기억과 기억하기’가 여전히 정치적으로도 살아있는 핫 이슈임을 입증해주었다. 다음 주의 국제 워크숍 주제인 ‘기억과 기억하기’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뤼트케 교수 생각은 어떤가.

뤼트케 = ‘기억의 정치’라는 것은 교과서의 기록이나 공식 행사의 연설처럼 한 사회나 국가가 공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쟁에서 누가 이기고 희생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차원의 축하행사, 기념일도 해당된다. ‘기억의 정치’에 관한 의례들은 기관화되었다. 개인들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쟁 직후 일반적으로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은 매우 제도화, 정치화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기억하기’는 개인들이 일상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보겠다. 1950년대다. 어머니가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은촛대를 없애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촛대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같은 집에 살던 유대인 일가가 1942년 강제수용소로 쫓겨날 때 두고 간 것이었다. 그것을 물려받은 어머니는 항상 죄의식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 생전에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다. 일상에서 ‘기억하기’란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유태인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은촛대를 가진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일 사회 일반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기억이 일상의 기억으로 바뀌는 변화는 1968 혁명이 계기였다. 청소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에게 홀로코스트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가 나치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믿지 않고, 부모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해 묻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까지는 히틀러와 나치 소수악당만 욕을 하는 상황이었다. 부모한테 물어보는 순간, 공식적인 기념의, 기억의 정치의 장으로부터 일상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 기억은 국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생존자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기억해내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학)’가 아니라 ‘기억하기’인 것이다. 

임지현 = 한국 사회에서도 박정희와 유신잔당, 전두환, 노태우 욕만 해왔다. 광주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할 때, 한국사회를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고 본다. 10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하다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웃음)

뤼트케 = ‘기억하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민초들의 일상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두 개의 예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괴팅겐에서 나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 적이 있다. 맹반대한 보수적 여론이 주장하듯이 보통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은 병사를 위해 기념비를 만든다. 파시스트의 명령을 거부한 탈영병을 기념하는 것은, 공식적인 기억의 정치와는 다른, 밑에서부터의, 풀뿌리의 기억 방식이다. 또 반정부 시위 중에 경찰차에 깔려 죽은 학생을 위한 작은 조각상을 만든 적도 있다.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 죽은 이를 애도하곤 했다. 두 경우 모두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두 기분 나빠하며 반대한 사례들이다. 

임지현 =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도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이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에게 바친’ 우스꽝스러운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제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 한복판에 탈영한 국군 병사를 위한 기념비를 만든다면, 보수적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무명용사의 탑 같은 것은 자식이나 부인이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권력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탈영병 기념비는 탈영병을 사회적 추방자로 모는 게 아니라 권력의 횡포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던, 풀뿌리의 새 영웅으로 기억하는 방식이다. 

뤼트케 = 탈영병이나 경찰차에 깔려 죽은 학생을 위한 것 같은 풀뿌리 운동으로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례가 또 있다. ‘쉬톨페른쉬타이네’(Stolpernsteine)가 그것이다. 길가다 걸려서 넘어지는 돌부리라는 뜻인데, 예술가가 만든 5㎝ 크기의 조그만 네모상자 금속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금속상자를 나치에게 추방당한 유태인이 살던 집 앞의 인도에 설치하면서, 그 윗면에는 그곳에 살던 유태인 이름, 생년월일, 추방연도, 죽은 날짜까지 적어뒀다. 길을 가다 넘어져서 보면, 여기 이 집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게 하는 작은 기념비인 것이다. 거창하진 않지만 이렇게 지역과 일상사 차원에서 유태인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본다. 

임지현 = 한국 경우에는 민주화 진영의 각종 기념사업회 같은 데 불편한 게 여전히 남아 있다. 박정희 기념비 프로젝트에 대항하려고 또 거창한 대체 프로젝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독재체제의 기념·기억의 정치의 형식·구조와 닮은 것이다. 우리는 지역 차원, 풀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 우리는 작은 기념비가 없다. 한국의 4·3항쟁에 대한 기념도 일상사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기억의 정치’ 차원에서 보면, 좌파나 우파가 4·3을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 실질적으로 제주도에 산 주민들은 일상에서 4·3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좌우 진영 논리를 갖고 어느 기억이 더 공식적인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싸움 보다는 일상의 기억하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친척을 잃고 고통받은 보통 사람들의 기억 말이다. 또 좌파와 우파의 진영론을 넘어서 일상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예컨대 경찰 가족의 고통스러운 기억까지도 포함해서, 좌우 양쪽 진영의 공식 기억에서 배제됐던 사람들의 기억을 살려내야 한다. 역사가들은 사실이라는 칼날을 들고 증인들을 취조하는 형사의 방식이 아니라 공감의 방식으로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는 접근방식을 취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담지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걸 도와주고 지켜봐주는 그런 기록자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뤼트케 = 독일의 작은 기념비와 비슷한 걸 봤다. 일본대사관 부근에 산다.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 사람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담요도 덮어주고, 모자도 씌어준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오더라. 사람들이 작지만 실질적으로 위안부와 그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런 게 풀뿌리의 방식이라고 본다. 독일 이야기를 더 하자면, 동독과 서독의 ‘기억의 정치’가 달랐다. 동독은 자신들은 나치즘과 관련 없다며 서독의 자본주의 문제를 비판했다. 서독은 동독 인민들이 어떻게 스탈린주의 같은 끔찍한 독재체제를 용인하느냐고 비판했다. 구 동독쪽에서 네오나치가 많은 게 바로 풀뿌리의 기억하기를 하지 못한 것과 연관된 듯 하다. 

임지현 =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본다. 남북한도 기억의 구조가 비슷하다. 남한은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3대 세습을 견디냐고 비판하고, 북한은 친일파 문제는 자신들은 없다며 남한만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남북한의 ‘기억의 정치’에서도 독일과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뤼트케 = 동독 사회를 일상사회학에서 보면 일종의 ‘틈새 사회’다. 정원사들의 모임이 동독에서 가장 큰 사회조직이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체제에 무조건 순응,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했다. 노동자들은 조그만 오두막에 30~40평 정도 땅을 가졌는데, 다들 거기로 도망간 사회였다. 공적인 영역에서 체제를 적극 지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자기만의 틈새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결국 일상사를 흑백으로만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게 아니라, 회색지대가 두텁게 존재했다는 말이다. 사회나 역사도 두터운 회색지대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 의식을 가져야 제대로 볼 수 있다. 희생자들 뿐만 아니라 독일의 비밀경찰 같은 이들도 ‘기억’을 갖고 있다. 

임지현 = 기억은 다중적이다. 현실사회주의 때 슈타지나 비밀경찰의 일상적 괴롭힘의 방식도 봐야할 것 같다. 그들은 고문이나 테러가 아니라 일상에서 사람들을 약올리는 식으로, 짜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괴롭혔다. 밤에 똑똑 문을 두드리고 나서, ‘잘못 두드렸습니다’ 하는 식이었다. 이게 뭐냐면,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심해라’는 뜻이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밤마다 일상의 괴롭힘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도 박종철 고문사건 같은 것은 많이 이야기하는데, 군사독재 때 일상에서 어떤 괴롭힘, 지분거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안 한다.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 등은 생체권력의 지표이기도 하지만, 일상에 대한 독재의 테러이기도 했다. 

뤼트케 =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을 두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잘 감시할 것인가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한 프로페셔널 경찰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프로페셔널로 여겼고,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지런함과 나쁜 짓을 분리시킨 것이다. 

임지현 = 일상사의 다른 단면도 있다. 박정희가 만주국의 경험에서 차용한 것인 주민등록증이다. 우리안의 파시즘 문제를 제기할 때 불심 검문 폐지운동 하면서 주민등록증도 없애자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 범죄자, 불법체류노동자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필요하다며 폐지를 반대했다. 나쁜 사람들 때문에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매우 안전한 사회가 된다고들 여겼다. 삼청교육대는 깡패를 소탕하고, 범죄율을 줄이기 위해 만든다고 했지만, 실제 깡패들은 삼청교육대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을까? 일종의 트레이닝 캠프, 커넥션 캠프 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뤼트케 교수에게서 배우는 바는 어떤 문제든 하나씩 단절된 게 아니라 복잡계처럼 얽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일상사를 한다고 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트레벨리안 류의 잡동사니 역사와는 다르고, 사소함 속에 응결되어 있는 축적된 역사를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150030021&code=960100 경향일보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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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 연인들

from 도서 2013. 4. 25. 19:24

- 애초에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뜬금없는 제안을 수락하는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일을 하려 들고 있는지에 대해 화가 났다. 오늘 만나게 될 여자는 그 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다.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그보다 두 살 어린 미혼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수십만 명에 이를 터였다. 수십만의 여자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한 명이라니. 세상에. 그 단 한 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하다니! 아아, 어리석은 희망이여. 그는 자책했다.


-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않아도 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어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는 인상이라는 것이 박민아를 아는 여러 벗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어색한 순간이면 먼저 웃어버리는 그녀의 버릇은 그러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인간관계에서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먼저 짓는 미소는 이를테면 먼저 쏘는 총알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으니 경계심을 갖지 말아달라'는 제스처 속에는 상대를 안심시키고 시작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으며, 이는 상대가 안심의 차원을 넘어 방심하거나 방만해졌을 때 내 쪽에서 뒤통수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다. 선제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잠언은 전쟁터에서만 쓸모 있는 게 아니었다. 

 

- 언젠가 홀로여야 한다면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무의식이 말하고 있었다. 


- 두 개의 다른 포물선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적에 대하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었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 연애의 종착역이 결혼이어야 할까? 통념상으로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비틀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연애'의 종착역이 결혼인가, 라고 한다면 말이다.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준호에게 연애란 비현실적인 어떤 것, 구차한 현실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은 그녀가 그에게 '떠난다'는 표현을 입 밖에 내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한 덩이 밀가루 반죽처럼 막연하던 상상이, 스스로에게도 느닷없던 충동적인 발화를 통해 세상에 던져진 뒤 빠르게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가는 못브을 민아는 얼마간의 두려움과 얼마간의 안도감으로 지켜봤다. 다행이다. 민아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말이 먼저 튀어나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해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 ..(중략) 자신이 더 늦은 시간을 택했다는 것을 그 순간 준호는 민감하게 의식했다. 그들은 각자 저녁 여덟시에 대해 생각했다. 여덟시, 자정까지 네 시간 남은 시각. 저녁이라기엔 늦고 밤이라기엔 이르다. 경탄 속에서 서로의 몸을 껴안고 보낸 여덟시들이 있었다. 창밖이 얼마나 깊고 푸른 어둠 속에 잠겨가는지 따위는 염두에 둘 겨를이 없던 그때. 몰입만이 전부였던 때. 이제는 아득하기만 했다.


- 그들은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에 소속되지 않은 관계였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연인 관계가 된다는 건 상대방과 일부일처를 모방한 배타적 관계를 맺겠다는 무언의 약속에 동의한 결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다. 서로의 사랑을 보증금처럼 걸었지만, 어떤 공식 서류에도 자필서명하지 않았고 어떤 사유재산도 공유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결국 타인에 불과했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인이었다. 개인적 책임감과 상호신뢰 따위의 보험신탁회사의 경영이념 비슷한 소리를 들먹이는 것 말고는 상대의 배신을 추궁할 어떤 권리도 없었다.


-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 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한 때 뜨거웠던 열정이 느린 속도로 사그라져 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고장난 조종간을 끝까지 지킨 기장과 부기장처럼 서로에게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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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변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중략)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저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중략) eni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 (중략) 그녀가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중략)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 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중략)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략) 첫 번재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 그는 책 속에 파묻힌 그의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적인 삶, 다른 남자들 혹은 여자들과 나란히 걸으며 느끼는 접촉, 그들의 환호 소리를 희구했다.
그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도서관에 고립된 연구 생활)이 그의 현실이며,
그가 현실이라고 간주했던 시위 행렬은 하나의 볼거리, 춤, 축제,
달리 말하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 (중략)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중략)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여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중략)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히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중략)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의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중략)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 (중략)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에요!"


-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벌주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 다음도 도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써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기를 바랬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하는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하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 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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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영의 법의 재발견

from 도서 2013. 2. 9. 11:45


1. 책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 

2. 주제가 되는 공간인 '집'에 대해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현대적 집(home)이란 공과 사의 공간을 구분하는 문자 그대로의 경계선을 표시한다. 또한 집은 공과 사의 영역 사이에 놓여 있는 비유적 경계선(metaphorical boundary)을 대표하기도 한다. 문자 그대로 공간과 비유적 영역에 있어 집(home)이란 개개인과 정부 권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미국 법에서는 집(home)에 대한 생각을 통해 범죄, 폭력, 섹스, 가족, 사생활, 자유 그리고 재산이라는 법적 개념들이 중요하게 형성되어다. 집이란 전통적으로 주거침입관련죄, 정당방위 및 가정폭력 관련 형법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비합리적인 수색과 압수(unreasonable search and seizure)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정당한 법적 절차(due process)를 보장받을 권리 및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헌법 권리들을 표현하는 중심에 집이 위치한다.'



 

 '집'을 법적으로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이 되시겠다.


3 . 이러한 집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하는데

 1) 전통적 관념으로서,
    타인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종적 장소로서의 집. 
    정부 침입, 통제로부터 개인적 자유를 누리는 장소
    (Lawrence V. Texas : 전통적으로 정부는 집 안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의 역할은 침입자로부터 '집'을 보호하는데 있고,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

 2) 현대적 관념으로서,  
    가정 내 구타, 성폭행, 위협을 공공의 중재, 개입(public intervention)으로부터 숨겨주는 역할.
    무서운 사랑(terrifying love)이 일어나는 범죄가 있는 곳(home-as-violence)
    이에 대해 경찰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가 가능. 
    사생활의 보장이 폭력의 연장선에 놓일 수는 있으나, 사생활 보장 자체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서
    가치 충돌이 발생.


 4. 종래 'Castle doctrine'에 따라 외부로부터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였던 집이
     Legal Feminism 등의 주장에 따라 가정 폭력이 형법화되고, '사적 문제'가 '공적 문제'로 재해석됨에 따라서
     형법의 전적인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가정폭력에 관하여 상당한 근거(probable cause)가 존재하면,
     경찰이 바로 체포하는 검거 의무화 법률(mandatory arrest laws)가 제정된 것.
     no-drop 기소정책에 따라서 피해자가 기소를 원치 않아도 검사가 의무적으로 기소하게 되었다.


 5. 특히 접근금지명령(Protection order)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에 의하면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주로 남편)이 접근을 못하게 되어
    남편이 집 주인이더라도 가정에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
    즉 가정 내에 피고인이 머무르는 것만으로 유죄가 되며, 가정은 형법적 통제구역이 된다.
    '질서 유지' '공공 삶의 질'과 같은 criminal justice policy의 중짐 주제들이 
     공공 장소의 범죄뿐 아니라 가정까지 외연이 확대되게 되는 것. 

    종래 폭력피해여성운동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생활 터전 공유'라는 상황을 막기 위해
    보호시설(shelter)을 최대한 이용했으나,
    피해자가 퇴거하기보다는 피의자가 그 집에서 배제당하고 
    피해자가 자신의 공간에서 안정, 자율성을 되찾아 '두려움 없는 집'을 만드는 것이 더 옳은 방향이라고 봄.

    이 과정에서 '집 안에 있는 상태(presence at home)'라는 비범죄적 행동이
    범죄가 되면서 구성요건의 대용물(the proxy)이 된다.

    또한 집 안 폭력이 범죄화되면서 가정폭력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최고 낯선 사람(superstranger)'이 된다.


6. 한편 가정폭력경범죄(misdemeanor domestic violence) 기소 과정에서 접근명령금지가 사용되면,
   이는 정부가 친밀한 관계(initimate relationship)를 종결하는 것으로
   결국 '정부 주도의 실질적 이혼(state-imposed de facto divorce)'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해당기간동안 대상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관련 배우자의 동의도 없이도 정부 주도 하에 실질적인 이혼 상태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기본권(the fundamental right to marry)이 침해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지만,(State V. Ross)
   연락금지명령이 수반되지 않는 가정폭력 대안으로는 같은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하여
   이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home privacy, public interest, criminal law control간에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가정 폭력 피해자의 보호도 물론 중요하지만,
   개인, 가정 공간에 대한 개인적 자주성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 하에
   정부 통제력에 종속화되고 있는 상황은 비판적으로 심사숙고해볼 만한 상황이라 하겠다.


7. 나는 요약 과정에서 많이 빠뜨렸지만
   'Castle doctrine'과 'true man' 'the subordinated(종속된) woman' 과 관련된
   '학대받는 여성과 그녀의 권리 신장(?)'이라는 측면도 이 책에서의 주된 시점 중 하나이다.

   (페미니즘 쪽에 관한 관심과 지식이 얕은 편이라서
   주로 기본권과 프라이버시에 관한 내용으로 요약의 중점을 둠..)
 
   저자가 인용한 문구를 재인용하자면,
   '아내를 때리는 것을 특별히 폭력적인 개인 또는 관계의 단순한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정의한 점은 페미니즘이 성취한 위대한 점 중 하나' 이며

   '법 안에서 사생활을 이론화시키는 것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중략) 법 안의 가정에서
   정조를 가진 부인이기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그녀가
   사생활의 의미를 놓고 벌이는 양면 가치를 지닌 논점을 상징하는 주체인 것이다.


 8. 우리 나라에서도
    부부강간의 인정 여부, 부부간 접근금지가처분 등이 논란이 되고 있는 현실임을 생각하면
    비록 적용 법리 및 판례는 미국의 것을 기준으로 하여 많이 다르긴 해도 
    '가정(폭력)' 'privacy' 등의 키워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긴 하다.


 

but, 이제부터 쓴소리.

1. 

이 책은 정말 학술적인 책이다. 'At home in the law'라는 무미건조한 영문 제목이 말해주듯
'가정'과 '법'의 관계를 다룬 법률 관련 전문 서적이다.
헌법의 기본권 파트, 검찰의 수사와 기소, 가정법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한두페이지 넘기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 책이 발간 후 호평을 얻었다지만
'대중적인 법률 안내 서적'으로서가 아닌,
전문적인 학술 서적으로 인정받고 평가받은 것이다.


그런데 'At home in the law'라는 제목이 어떻게
'법의 재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될 수 있으며,
어딜 봐서 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인지는 모르겠다.

법과 제도의 제정에 따른 가정과 법률 사이의 관계의 변천, 가정 개념의 변화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나.


이 책이 왜

카데고리에 들어있는지 매우 알 수 없다.



2. 그리고 미국 법사회협회 선정 '올해의 최고의 법률서적'으로 허버트 제이콥 상을 수상했다는데

허버트 제이콥 상은 이런거다. (http://www.lawandsociety.org/awards.html#Jacob)




herb jacobHerbert Jacob Book Prize
Established in 1996 as the LSA Book Award, and re-named in memory of Herbert Jacob, past President of LSA, the competition is open to books from all fields of, and approaches to, law and society scholarship—excluding only works of socio-legal history, which are considered for the Hurst award—published in the prior year, and self-nominations are accepted.

Herbert Jacob was the founder of the first internet book review in the field, Law and Politics Book Review, a creative, energetic scholar who took on a wide variety of questions and issues, and a warm human being whose own work has been a major contribution to the field of law and society. The award is intended to recognize new, outstanding work in law and society scholarship.

Nominations are accepted from all aspects of the field and any country of origin and may include first books of young scholars to books that are capstones of long careers in law and society research and publication. 

The award is a cash award of $500, (which is shared in circumstances of multiple awardees).



동급의 상으로만


이렇게 많은데, '올해 최고의 법률서적'이라는 표현은 좀 낯간지럽지 않은가.
상금이 권위를 대신하지는 않지만 500달러짜리 상이다.
그리고 법사회학 자체가 그렇게 큰 분야도 아니고,
학부 수준에서는 법철학과 더불어 4학년때 전공선택으로 학년당 1/20 정도의 학생이나 수강할까 말까 한데.

(법사회학을 비하할 목적은 없다. 미국 법사회학회 우수 도서중 하나가 '올해 최고의 법률서적'으로 둔갑된 데에 대한 어이없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


3.

그리고 가장 나를 분노케 했던 것은

발번역

정말 문장을 발로 번역했다.


물론 문학 전공자인 석지영씨의 커리어가 말해주듯, 문학적 메타포와 어려운 법률 개념이 뒤범벅되어
번역이 쉽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주술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애매한 용어는 혼용된 것이 많아서 엄밀한 개념을 잡기가 매우 혼란스럽다.

어느 정도냐면 번역된 문장에서 원 문장을 유추할 수 있고,
그 유추된 원 문장을 다시 자연스럽게 번역할 수 있는 여지가 읽는 과정에서 떠오를 정도이다.

번역자도 문제지만, 
이렇게 번역이 엉망으로 되었는데도 출판을 묵인한 저자 본인의 저의도 의심스럽다.


4. 

이건 사견이지만.

4학년때 우리과에 석지영씨가 강연을 온 적이 있다. 
늦게 가서 맨 뒤에서 졸면서 들었지만..

하여튼 강연은 전부 영어로 이루어졌다. 
최근에 새로운 책을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책 관련 인터뷰도 전부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런 '영어' 위주의 본인의 아이덴티티와 별개로,

동양인 최초의 하버드 로스쿨 종신교수임을 너무 강조하고,
'하버드'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 분위기 답게 '한국인 하버드 교수'임에 도취되어서
오히려 반감이 들 정도로 그녀를 띄워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종합하자면, 

가정 폭력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자 이루어진 제도, 법률의 신설이
아예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변화시키고, 
단순한 폭력의 방지 및 격리 목적의 조항들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결국 정부 주도의 실질적 이혼(state-imposed de facto divorce)으로까지 연결되는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꿰뚫는 저자의 시각이 사뭇 날카로운 흥미로운 책이지만

내용 외부적인 측면, 특히 마케팅/번역 등에 관련해서는 굉장히 불만히 많은 책이기도 하며
일반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펼칠 만한 책은 절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낚여서' 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허세든 과시적 소비이든 지적 호기심이 되었던 간에,
최근 몇년간 우리 나라에서 미술이나 음악 분야의 전시회 및 공연이 활발하게 열렸던 것이 사실이다.
평범한 대학생도 한번쯤은 고흐전 루브르전 오르셰전에 발길을 옮겨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클림트의 '키스'니 모네의 '수련'이니 하는 작품도 다들 어느 정도는 눈에 익을 것.


하지만 이러한 단편적 지식 및 경험은 증가하는데 반해
이를 체계적으로 엮어줄 통사적인 관점은 대체로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일 것이다.
나또한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즐겨 찾는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하나의 작가로, 하나의 작품으로, 한 시대를 뚝 떼어낸 기획전으로 접한 경험은 많았어도
이게 어떠한 배경, 어떠한 상황에서 쓰였는지에 대한 통찰은 거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어느 정도 예술 작품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것이 '예술사' '미학사' 등이 될 것이다.
머리 속 흩어져있던 점들 사이에 선을 그어주는 역할을 하며, 
작품과 작가의 맥락, 시대적 요구 및 배경 등의 지식 축적을 통해
문화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자양분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손색이 없는 책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어떠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변화 발전되어왔는지
짧은 테마별로 끊어서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잘 서술된 책이다.
물론 작가가 말했듯 '여전히 서양 위주의 역사 기술이라는 단점을 벗어나지 못했고'
다루는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라 - 미술, 음악, 문학 등을 두루 다루다 보니 -
디테일한 부분은 떨어지는 감도 있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자신의 예술적 경험 등을 잘 대입하여 꼬치 꿰듯
하나의 맥락으로 예술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독서 과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두껍고 쉽지 않은 책이지만, 재미나게 읽은 책. 칼라 삽화도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어 시각적 즐거움도 준다.


이미혜, 열린 책들, 2012. 01. 25, 533p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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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관계이며, 소통이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탈출이며, 존재의 증명이며, 해방이자 자유이며,
한편으로는 어둠이며, 죄악이며, 자해이며, 허무이며, 절망이며, 폭력이며,
파괴이자 자살행위인 것이다.'

'Mea Culpa
, Mea Culpa, Mea Maxima Culpa..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

'K 스스로 판결을 내려도, 경범죄가 아닌 인륜의 금기를 깨는 중죄임에 분명하였다.
그런 중죄가 3,4분의 짧은 고백만으로,
'주의 기도'를 세 번 외우고 성경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무죄가 될 수 있는가.
못은 빼도 못자리는 남는 것이 아닐까.
사제에게 한 고백만으로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빠른 시간 안에 밀수품을 사고 파는 불법 거래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소설의 제목은, '낯익은 타인'을 주제로 하고 있다.
'낯섬'을 본질로 하는 타인에게서 '낯익음'이라는 단어를 수식시켜 일견 모순되는 듯한 제목이 암시하듯,
자아와 피아, 낯익음과 낯섬, 익숙함과 생소함을 넘나들며
요동치는 기억과 현실 속에 복잡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하여튼 뭔가 작가의 의도가 잡힐듯 말듯 하면서,
나에게는 다소 읽기가 벅찬 소설이었다.
격한 비유와 섹스에 대한 묘사도 소화하기 꺼림칙했고,
극도의 혼란을 일으키는 전개 양상은 마지막에 당황스럽게 수습되는데, 
편한 말로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 문학적 수양과 성찰의 깊이가 얕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꼭 이렇게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불편한 책.


이 책이 최인호 작가에게는
등단 이후 처녀작 위주의 1기와, 역사/종교소설 위주의 2기를 넘은,
3기로 구분되는 현대소설 집필의 서막을 알리는 책이라는데,
나는 최인호씨의 역사소설을 감명깊게 봤던 사람으로써 다소 불편한 변화이긴 하다...


이 책에 대한 부족한 이해로 인해, 검색한 서평을 붙여넣으면서 의미를 부여해보며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뒤틀리고 붕괴된 현실의 틈새에서 발견한 진실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조금 깊이 들여다보기


이 작품은 특이한 구조와 그로테스크한 작중인물의 설정, 환상주의와 사실주의를 넘나드는 이야기 전개만큼이나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때문에 빠르게 읽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1. ‘역할’로 점철된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그리다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범적인 가장으로서, 의사 친구와 가깝게 지내며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스스로의 도덕적 결함을 견디지 못하는 제도적 인간으로서, 그리고 주일마다 미사에 반드시 참석하는 견실한 신앙인으로서 K는 생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일상이 조작되고 현실에 균열이 생기며, 그로 인해 환상과 실재의 공간을 오가면서 K는 사실 조작된 것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주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급기야 처음에는 자신의 행세를 했을 것이라 믿었던 또 다른 ‘K’에게 순순히 ‘참 자아’의 자리를 내주고 만다. 자신이 쌓아온 견고한 삶이 생의 진짜 모습은 아니라는 깨달음 때문이다. 생은 때때로 허물어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기도 하는 것. 자신이 만든 견고한 삶은 하나의 무대에 지나지 않았으며, 거기에 ‘진짜 삶’은 없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K는 자신의 배역과 역할에 충실한 동안 정작 자신의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습을 상징한다. 도덕적이고 합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세상에 떳떳하다는 것은 인간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 제도에 순응함으로써 갖게 된 스스로의 착각일 뿐이다. 그 단단할 것 같은 일상에 금이 가면서 K는 자신을 의심한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계획과는 다르게 진행된 또 다른 삶을 목격하는 것이다.

2. 일상과의 이별을 통해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소설가 김연수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독법의 열쇠를, 작가가 1972년에 발표한 단편 「타인의 방」에서 찾고 있다. 김연수는 「타인의 방」을 두고 쓴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그는 타자가 기획한 무대에 등장한 어릿광대이며 속임수에 빠진 가련한 희생자에 불과하다”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K가 처한 상황 역시 왜곡되고 뒤틀리면서 일상의 공간이 비일상의 공간, 연극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본래의 우리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일상의 틈을 통해서다. K가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순간은 지진의 균열이 일어날 때와 일치한다. 디디고 선 땅이 물렁해지는 이 의심의 순간은 진실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심을 통해 만나게 되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건 일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리라. (…) 현실은 언제든 그처럼 붕괴될 수 있다는 점, 그게 바로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별사(別辭)인 동시에 어떤 붕괴에 대한 보고서랄 수 있다.
_「발문」, 김연수(소설가)

그리고 이 작품 후반부에서 K는 월요일 아침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서 지난 이틀 동안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인사를 한다. 이 ‘거대한 작별의 장면’을 두고 김연수는 현실이 붕괴된 뒤 K 자신과 함께 사라질 현실의 꼭두각시들과 작별하는 의식이라고 말하면서, 이 모든 것과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밝힌다.

3. 현실의 균열 속에서 진실과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다
이 책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작가가 성경 「탈출기」의 내용을 장치해놓은 것 역시 이 작품을 해석하는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르는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이 작품의 끄트머리에서 K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K1’과 합체되는 장면과 연결되고 있다. K는 주말 이틀 동안의 카오스와 붕괴를 겪은 뒤 맞는 월요일 아침에 자신이 맡아온 배역의 캐릭터를 완전히 변화시키면서 ‘온전한 나’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것은 구체적인 세상과 현실과 일상에 오염되기 전, 창조주의 계획으로만 존재하던 ‘나’의 신성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수없이 많은 ‘나’들이 만든 세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나’를 구원하는 희망의 전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바라보든,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최근 작가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논해야 할 화학적 반응의 결과물이다. 소설 속 주인공 K는 사흘 동안에 일어난 비현실적인 사건을 통해 변신한다. 세상의 잣대로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K의 결말은, 결말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작가 역시 어떤 이별을 통해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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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매니지먼트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은 약하다. 가련하리만치 약하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다.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란 비용이자 위협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부러 비용을 부담하거나 위험을 감당하려고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고용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지닌 장점이나 능력 때문이다.
조직의 목적은 사람의 장점을 생산으로 연결하고,
그 사람의 약점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보면서 큰 감흥 없이, 무가지 넘기듯 쓱쓱 한시간만에 읽은 책.
전입대기하면서 행정반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벼워보이는 표지 때문에 골랐는데 상황에 아주 잘 맞는 책이었음.


하여튼 '쉽게 읽힌다'는 것은 책이든 문장이든 글이든 큰 미덕이 아닐 수 없으나,
한편으로 음미할 대목이 없다는 점이기도 하다.


예상되는 전개, 큰 굴곡 없는 스토리, 착한 결말 등 그냥 쉽고 편하게 읽기 좋은 책.
경영/매니지먼트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마저 없는 사람이
뭔가 관련 서적을 읽어보고는 싶은데 전공서적에 도저히 손이 안 갈때
슥슥 읽어볼만한 책. 
커피 체인점 점장이나... 하여튼 경영학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이
조직을 꾸려나갈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대학에서 경영/경제 관련 수업을 들었거나 관련 서적을 접한 사람은 아무런 감흥이 없을듯.


하여튼 나름 일본 생각도 많이 나고, 책 내용보다는 잡다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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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나 유감스러운 것은, 폐하께서 조물주가 만드신 인간을 당신의 손으로 다시 만드시고
이 새로운 인간 위에 신으로 군림하면서 그만 조그마하나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아직 인간임을,
조물주의 손에서 태어난 인간임을 잊고 계신 것입니다.
폐하 또한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이 괴로움도 욕망도 느끼실 것이고, 남의 동정도 필요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이제 신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재물을 바치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모습이 뒤바뀐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불운하게도 자연의 비뚤어진 모습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인간을 비하시켜서 당신의 단순한 악기로 삼으신다면,
그 누가 폐하와 더불어 선율을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유감스러운 것은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는
사형을 지시한 사람의 정신을 결코 찬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사를 기술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 이상 고귀한 존재는 아닙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악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설혹 누군가가 그 악기를 사서 보관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악기는 그자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사들인 것은 그 악기를 산산조각 낼 수 있는 권리뿐입니다.
은방울의 울림을 일깨우는 영묘한 노래의 가락에 녹아드는 기술을 사들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현자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미는 마음으로 느끼는 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훈련소에서 읽은 책.
훈련소에서 읽은 두 책이 공교롭게도 서양고전 + 연애물이라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독서를 즐기는 편이지만, 희곡 류는 접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어체로 장황하게 서술된 소설류만 읽다가 구어체로 생생하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마음을 맡기니
특유의 박력과 활동감 속에서 책장이 매우 빨리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제법 두꺼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고, 술술 넘어간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
'돈 카를로스 - 스페인의 왕자'와 '오를레앙의 처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것이 훨씬 재미있다. 비극적인 결말도 뭔가 감동적이고 장대하고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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